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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어떤 생각] (6) 형식이 아니라 내용?
입력 : 2015.03.20 15: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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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은 연휴가 길어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갔다고 한다.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이고 차례를 지내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던 설 풍습을 생각하면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설을 지키는 의미는 사라지고 그냥 노는 날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곳곳에 스민 현대인들의 실리주의적 생각이 만들어놓은 명절 풍경들이다. ‘허례허식을 버리고 실용주의적으로 내실 있게!’ 이런 캐치프레이즈에 의하면, 명절날 하루 입으려고 한복을 준비하는 것은 번거롭고 비경제적이다. 입맛에 맞지도 않는 명절 음식을 따로 장만하는 것 역시 번거롭고 비경제적이고 자주 보지 않고 볼 필요도 없는 사람을 명절이라고 굳이 만나는 것 역시 그러하다. 그런 시간에 차라리 스키를 타거나 여행을 가는 것이 낫다. 말하자면 그 편이 유리하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은 반박이 어려운 명제지만, 맥락과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서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절대적 명제라는 것도 없는 법이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서 내용을 자연스럽게 실리와 동일시하면서 어색해하지 않는 것은 어색하다. 어색한데도 우리는 어색해하지 않는다. (내용과 동일시된) 실리를 담보하지 않은 모든 종류의 형식을 백안시하는 실용주의적 가치관이 범람하고 있는 까닭이다.
급격하고 빠른 변화의 역사 속에서 우리도 모르게 습득해온 생존의 방식 같은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지속과 유지보다는 단절을 더 자주 경험하며 살았다. 지속과 유지보다는 단절이 더 빠르고 더 확실한 역사의 동력이라는 걸 경험하며 살았다. 단절하는 사람은 왜 단절하는가. 단절한다는 것은 이전 것의 부정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이전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거나 방해가 된다는 판단과 관련되어 있다. 그만큼 우리의 과거가 떳떳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고 묻는 것은 뜻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런 과거도 있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살아낸 세월들이 그만큼 험악했고, 그런 세월의 예측불허의 변화 속에서 더 유리한 쪽을 택하려는 집단 무의식이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우리는 낡은 집을 보수하고 고치며 사는 것보다 일단 헐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 익숙해 있다. 아파트를 헐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다시 짓는다.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이 똑같은 건물이라고 해도 일단 부수고 짓는 것을 선호한다. 재건축과 재개발이 우리나라만큼 활발한 나라가 없을 것이다. 지은 지 몇 십 년만 되면 오래되었으니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한다는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은 몇 백 년 된 빌딩을 수리해가며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유럽 사람들에게는 매우 의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거의 항상 행정조직과 사회의 크고 작은 구조, 심지어 사람들의 가치관까지 바뀌는 것도 마찬가지다. 새로 지은 것이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일지라도 일단 부수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조직, 다를 게 없는 구조를 세우더라도 일단 과거 정권의 것은 부수고 보려는 심보가 있는 것 같다. 이런 부정과 단절의 되풀이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 유산들을 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전통과 형식은 무시의 대상이 되었다. 미덕이나 가치관도 끊어지고 새로 생겨나는 일이 빈번해졌다. 마치 유행가처럼 되었다. 오늘 좋은(좋다고 인정되는) 것이 내일 나쁜(나쁘다고 비난받는) 것이 되어도 별로 놀라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실용주의자인 우리는 전통과 형식을 경시하고 기념과 의식과 절차에 대해 아주 시니컬하다. 이를테면 나는 결혼식장에 10분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예식에 참석하지 못한 경험을 최근에 했다. 어떤 작가의 책이 나와 모인 자리에 가면 책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시고 온다. 그런 데 갔다 오는 길은 뭔가 소중한 걸 잃어버린 것처럼 쓸쓸하고 허전하다.
이익이 되거나 쾌감을 주는 것이 아니면 다 무시하고 버려도 된다는 생각은 무섭다.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이익을 주거나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라면 참아주지만, 그렇지 않다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참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범람하고 있다. 귀찮고 번거로우며 비경제적인 모든 일은, 무의식 속에서 악으로 선언되는 듯하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런 뜻에서 보면 아주 오래된 형식인 명절의 의식과 풍습이야말로 귀찮고 번거롭고 비경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참아줄 이유가 없을 테고. 그 의식과 풍습 속에 들어 있는 깊은 뜻과 지혜와 교훈에는 관심을 줄 여유가 없어졌을 테고. 깊은 뜻과 지혜와 교훈이라니? 그런 것은 실리를 주는 한에서만 억지로 참아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형식을 무시하고 부정할 때 무시되고 부정되는 것은 내용이기도 하다. 형식을 무시하면 내용도 부서진다. 내용이 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내용은 결코 실리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는 명제는 수정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존재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형식에 의해 지탱된다. 형식이 무너지면 존재가 위태롭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4호(2015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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