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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 교수의 중국문명 기행] (15) 마오(毛)의 중국, 그 진실에 대한 두 시각
입력 : 2015.03.06 15: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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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린자오의 묘지, (오른쪽)린자오
이영희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한국의 대학생들을 사로잡았던 가장 대표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그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은 1970년대 중반 이후 강의실 밖의 교과서로 기능하면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당시의 나 역시 이 책들을 통해 권위주의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거짓으로 규정할 수 있는 논리적 능력을 획득했고,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본질을 새롭게 인식했으며, 중국과 북한에 대한 적대적 눈길을 부러움의 눈길로 바꿀 수 있었다. 당시의 반공교육과 권위주의 정권에 신물이 나 있던 1970년대와 1980년대 세대들은 이영희의 책을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의 적은 마오쩌둥의 중국이 아니라 미국과 미국 제국주의의 실질적 식민지로 전락해 있는 우리나라라는 인식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지만 이영희는 <우상과 이성>의 책머리에서 이렇게 썼었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그 시절 이영희는 자신의 글 때문에 자주 직장을 쫓겨나거나 감옥살이를 했으며,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진실에 대한 용기 있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당시 우리들의 영웅이 되었다. 그런데 한참의 세월이 지나 중국의 지식인과 자주 만날 기회가 생기고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에 대한 진실이 하나둘 공개되면서, 나는 젊은 시절 이영희가 우리에게 용기 있게 알려준 그 진실이 진실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당혹감에 마주쳐야 했다. 마오의 중국을 제대로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우리와 중국의 현실에 대해 파천황의 시각을 심어준 이영희의 책들이 거대한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영희의 <우상과 이성>
린자오는 1954년 쟝쑤성(江蘇省) 대학 입학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후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마오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운동에 열정적으로 호응하여 베이징대학에서 인간의 자유와 진실을 파헤치는 활동을 열정적으로 시작했다.
공산당은 처음에는 “말하는 자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言者無罪)”고 천명하며 적극적인 발언을 호소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공산당에 대해 훨씬 강도 높은 비판이 제기되자 1957년 6월부터 비판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반우파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린자오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린자오가 생각했던 진정한 사회주의 문화정책은 부르주아 운동, 자본주의 부활을 위해 당권에 도전하는 반동적 우파 운동으로 몰려 총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린자오는 자숙을 강요받았지만 자숙하지 않았다. 1958년부터 1961년 사이에 마오의 대약진 운동은 중국 전역을 참담한 기근으로 몰아넣으며 3000만명에서 5000만명으로 추산되는 아사자를 낳았다. 이런 끔직한 인재(人災)에 대해 린자오는 “아무도 용기를 갖고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조국은 희망이 없을 것”이라는 자세로 공산당의 정책을 비판하는 지하 등사물을 준비하다가 체포된 것이다. 이후 린자오의 삶은 강제노역과 수감생활의 되풀이였다. 극우파로 찍힌 남자와의 연애 때문에 공산당의 미움을 사고 이별을 강요당했으며, 반성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수감생활은 더욱 길어지고 혹독해졌다. 린자오는 그야말로 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반혁명분자로 몰려 20년형을 받고 상하이의 교도소에 수감된 것이다.
린자오의 수감생활은 인권과는 거리가 먼 비인간적 학대의 연속이었다.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금지된 독방생활, 온갖 비인간적 모욕과 학대와 성폭행의 위협을 견뎌야 하는 생활이었다. 이런 수감생활 속에서도 린자오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념을 꺾지 않은 채 자기 몸의 피를 뽑아 20만자에 달하는 글을 남겼다. 그 결과 중국 공산당은 린자오를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8년 4월 29일 비밀리에 총살했다. 그리고는 그의 어머니에게 처형을 통보하며 “총살에 쓰인 총알값 5펀(9원)을 내라”고 요구했다.
린자오는 마오쩌둥이 자신의 절대적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류사오치(劉少奇) 일파로부터 행정적인 권력을 재탈취하려고 일으킨 문화대혁명이 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처형당했다. “우리의 위대한 중국 공산당과 위대한 영도자인 마오쩌둥 동지에 대해 미친 듯이 공격하고, 저주하고 중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처형의 이유였다. 린자오가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당국이 돌려준 혈서에는 마오쩌둥을 지칭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 “저런 건방진 계집 하나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발언은 그의 조급한 성격, 완고한 고집, 거만하고 무례한 그리고 그의 광적인 상태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 독재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두려워한다. 그는 강과 바다를 정복했다. 결국엔 장제스의 군대를 몰아냈다. “그런 내가 저런 애송이 하나도 굴복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며 그는 정말로,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홍위병
그렇다면 린자오야말로 홀로 외롭게 권력의 절대화에 맞서 처절한 투쟁을 벌인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찍이 공자는 삼군을 통솔하는 장군을 사로잡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필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린자오는 자신의 짧은 생애를 통해 어떤 절대 권력자도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한 개인의 양심까지 꺾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영희의 글이 마오의 중국에 대해 잘못된 지식과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한 데에는 물론 당시 한국의 권위주의 체제가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영희를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는 공산주의 체제의 실상에 대해 접근하는 것이 극도로 제약당하던 당시의 반공체제가 그의 글에 한계를 주었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식인으로서의 이영희는 독자들 앞에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고백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글에는 언제나 상황의 몫으로 돌려버릴 수 없는 책임이 함께하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이영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어떤 존경받는 지식인도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던 전례를 이영희 역시 따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중국의 지난 시절에 대해 여전히 침묵하는 다수의 한·중 지식인들이 유감스럽다. 그리고 린자오의 가냘픈 용기가 한없이 존경스럽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3호(2015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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