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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어떤 생각] (4) 사과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입력 : 2015.01.08 14:5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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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사고는, 어떤 성격의 접촉이든, 크든 작든, 어디서 발생했든, 당사자들이 원한 것이 아니니까(당사자들이 원한 접촉은 사고라고 부르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성가시고 불편하고 유쾌하지 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이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사과를 하고 어떤 사람은 비난을 택한다. 그런데 비난하는 사람은 왜 비난부터 하는 걸까. <무의미의 축제>의 작가는 문명화된 사회에서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예시로 이 문제를 다룬다. 다른 사람한테 잘못을 뒤집어씌워서, 그러니까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승리를 쟁취하려는 의도가 여기 들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 의하면 비난은 상대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죄인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한 예술단체의 책임자가 부하 직원들을 향해 던졌다는 끔찍한 막말들을 들었다. 항공기 회장의 딸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사소해서 ‘접촉’이라고 할 수도 없는 문제로 고성을 지르고 승무원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아주 최근에 일어난 일들이다. 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막무가내의 처신을 이해하기 위해 쿤데라를 참조해야 할까. 이를테면 이들은 무조건 상대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죄인으로 만들어 승리하기 위해 비난과 욕설을 이용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들은 세상을 싸움터로 보는 것이 틀림없다. 먼저 비난하지 않으면 사과해야 하기 때문에 무조건 비난부터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개별 상황의 고유함과 사안에 대한 섬세한 고려 없이 오직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강박에만 매달릴 때 생기는 현상이다. 싸움터에서는 누가 잘했느냐 잘못했느냐, 얼마나 잘했고 얼마나 잘못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기느냐 지느냐만이 물어질 뿐이다. 이기는 것이 잘한 것이고, 지는 것이 잘못한 것이라는 끔찍한 왜곡 현상이 현실을 덮는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특정 분야, 특별한 상황에서, 아주 예외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너그러울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더 그악스러운 행태를 보이는데, 단순히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그런다기보다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당할 것 같아 선제적으로 공격을 하는 조급증으로 읽을 수 있다. 정당성의 기반이 없는 권력자들이 왜 폭정을 할 수밖에 없는지, 우월한 위치의 이른바 ‘갑’들이 왜 몰인정하고 사나운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그들의 그 안하무인의 난폭함은 혹시 무조건 사과부터 하고 보는 (습관에 젖은) 사람들에 의해 부추겨지고 있는 측면은 없는 것일까.
부추기지는 않는다고 해도 계속 유지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사과를 하는 사람들은 잘못을 자기 안에서 먼저 찾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죄책감을 쉬 느끼는 사람들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죄책감은 죄인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죄를 짓지 않고도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죄를 짓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죄책감이 없는 사람은 죄인이라고 단정해서 말할 수 있다. 비난부터 하는 사람은 아마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죄책감은 싸움을 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세상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타인에게 죄책감을 씌우려고 할 뿐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부당하게 타인에게 죄책감을 씌우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사과부터 하는 사람은 타인에게 죄책감을 씌울 의도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자기 안에서 잘못을 찾는 사람이다. 적어도 이 사람은 세상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투쟁의 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싸우려 하지 않는 이들의 선한 생각이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의 호전성을 더 키워주고 더 함부로 행동하게 만들어 준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쁜 사람을 더 나쁘게 하고 세상을 약육강식의 험악한 전쟁터로 만드는 데 한 몫 거들고 있다면 이들의 무조건적인 선함을 무조건적으로 높이는 것이 마냥 옳기만 한 것일까. 쿤데라의 소설 속 인물은 말한다.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
물론 그런 세상이 더 좋다. 빠짐없이, 지나치게, 서로 사과하는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꿈꾼다는 건 현실에서는 실현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작가는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바람직한 소원을 말할 때 ‘어쩜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말하게 한다.
사과부터 하고 보는 선한 마음과 함께 요구되는 것은 사과를 해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하는 분별력이다. 이 말은 슬픈 목소리로 하지 않아도 된다. 사과하지 않아야 할 일에 사과하는 것은 분별력 있는 행동이 아니니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과가 비난하는 사람에게 반성할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나쁜 현상을 더 나쁘게 하는 것이라면 선한 행동도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선한 행동도 아니라면 더욱 하지 말아야 한다. 남에게 죄책감을 덧씌우지 말아야 하지만 근거 없는 죄책감을 자기가 덮어쓰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사과할 일만 사과하고 사과를 받을 일에 대해서는 사과를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
이승우 1959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났다.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에리직톤의 초상>이 당선되며 등단했고, 소설집 <구평목씨의 바퀴벌레>, <일식에 대하여>, <미궁에 대한 추측>, <목련공원>,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일기>, 장편소설 <내 안에 또 누가 있나>, <식물들의 사생활>, <생의 이면>, <그곳이 어디든>, <한낮의 시선>, <지상의 노래> 등을 발표했다.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2호(2015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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