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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어떤 생각] (3) 걷는 사람
입력 : 2014.12.19 14: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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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공원이어야 된다든가 복잡하지 않아야 된다든가 공기가 좋아야 된다든가 하는 원칙이 없다. 물론 걷기 좋은 길, 더 걷고 싶은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도 언제나 한결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길이 언제나 더 걷고 싶은 길인 것은 아니다. 호젓한 강변길을 걷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복잡한 골목길에 더 이끌릴 때도 있다. 걷는 사람은 시간도 가리지 않는다. 새벽이어야 한다든가 햇빛이 좋아야 한다든가 해거름녘이어야 한다든가 하는 원칙이 없다. 물론 걷기 좋은 시간, 더 걷고 싶은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도 언제나 한결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시간이 언제나 더 걷기 좋은 시간인 것은 아니다. 햇빛 좋은 시간에 걷고 싶을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해거름녘에 더 이끌릴 경우가 있다.
날씨 역시 걷는 사람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비가 너무 심하게 오지 않는 한, 바람도 눈보라도 걷는 사람의 발걸음을 잡아 두지는 못한다. 걷는 사람에게는 걷기에 좋은 날씨가 따로 없다. 날씨가 좋아서 걷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날씨가 나빠서 걸어야겠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혼자 걸어야 하는가, 누군가와 함께 걷는 것이 좋은가”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어떨 때는 혼자가 좋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떨 때는 누군가와 같이 걷는 것이 불편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기분이 좋을 때 걷는가, 우울할 때 걷는가, 느리게 걷는 것이 좋은가, 빠르게 걷는 것이 좋은가”하는 질문 역시 무의미하다. 정해진 규칙은 없다. 그런 것을 정하는 것은 걷는 길이거나 시간이거나 날씨거나 몸이다.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걸을 때 중요한 것은 발과 다리의 움직임이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부차적이다. 걷는 사람은 걷는 것이 걷는 목적이고 이유이기 때문에 다른 목적이나 이유를 만들지 않는다. 다른 목적이나 이유가 없으면 걷지 않는 사람은 다른 목적이나 이유가 있을 때만 걷는다. 그러나 다른 목적이나 이유 없이 걷는 사람은 다른 목적이나 이유가 없을 때만 걷는다. 걷는 것이 목적이고 이유일 때만 걷는다. 걷는 것이 목적이고 이유일 때 걷는 것만이 참으로 걷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걷는 일의 유용함에 대한 이런저런 견해들이 있다. 목적과 이유가 없다고 해서 효과와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건강에 좋고 뇌를 활성화해서 사색을 이끌어내고 자아를 돌아보게 한다고 한다. 아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은 밥을 먹으면 건강에 좋고 활력이 솟고 삶의 의욕이 생긴다는 말과 비슷하다. 사실이지만, 늘 그런 걸 의식하고 밥을 먹는 것은 아니다. 밥을 먹어서 얻어지는 효과와 소득을 밥을 먹는 목적과 이유로 둔갑시킬 필요는 없지 싶다.
목적과 이유는 아니지만, 걷는 것을 통해 얻어지는 효과와 소득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내 경험에 의하면 ‘발견’이다.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어느 날 문득 눈앞에 나타난다. 수없이 자주 다닌 길이고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던 것인데, 어느 순간 문득, ‘어, 저게 저기에 저렇게 있네’ 하는 탄성이 나오는 순간이 있다. 햇빛이 떨어지는 나뭇잎이기도 하고 찌그러진 간판이기도 하고 강물에 비친 달이기도 하고 담을 타고 오르는 넝쿨손이기도 하다. 어제의 나뭇잎, 어제의 간판, 어제의 달, 어제의 넝쿨손은 오늘의 나뭇잎, 오늘의 간판, 오늘의 달, 오늘의 넝쿨손이 아니다. 어제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이 오늘 문득 발견되는 것처럼, 오늘 발견된 것이 내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일종의 창조다. 사물들은 순간순간 태어난다. 어제까지 없던 것이 오늘 태어난다. 어제 없던 나뭇잎과 간판과 달과 넝쿨손이 오늘 창조된 것이다. 심지어 한 도시가 창조되기도 한다. 내일은 무엇이 발견되고 창조될지 모르기 때문에 걷는 사람은 어제 오늘 걸었던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다. 김광규 시인은 < 어느 돌의 태어남>이라는 시에서 이 사실을 알기 쉽게 표현했다. ‘지금까지 아무도 / 본 적이 없다면 이 돌은 / 지금부터 / 여기에 / 있다.//
내가 처음 본 순간 / 이 돌은 비로소 / 태어난 것이다.’
발견이 창조이다. 보는 것이 곧 창조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경이롭고 놀랍다. 그렇지만 그런 경이롭고 놀라운 경험을 하기 위해 걸으라고 충고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그런 경이롭고 놀라운 경험을 하기 위해 걷는 사람은, 바로 그 목적 때문에 그런 경이롭고 놀라운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다. 그런 경험은, 다시 말하지만, 효과이고 소득일 뿐 목적이나 이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걷는 것이다. 발과 다리의 근육을 움직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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