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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쌍녀분(雙女墳)을 찾아서
입력 : 2014.04.25 17: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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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춘현(高淳縣) 유채꽃
18세에 당나라 과거 급제한 최치원 최치원이 세계제국을 자랑하던 당나라에 온 것은 AD 868년이었다. 그리고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서 진사가 된 것은 874년이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유학을 와서 불과 6년이 지난 18살의 나이에 당당히 당 제국의 지식인들과 경쟁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해 최치원은 886년에 쓴 『계원필경(桂苑筆耕集)』 서문에서 다음처럼 쓰고 있다. “제가 열두 살 때 집을 떠나 서쪽으로 배를 타려할 때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훈계하시기를 ‘네가 10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말하지 말라, 그리고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하지 않을 터이니, 그곳에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다하라’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그 엄한 훈계를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다른 사람이 백을 노력하면 저는 천을 노력한 결과 공부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이름을 급제자 명단에 올렸다”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과거에 급제한 후에도 최치원의 앞길은, 우리가 과거급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과는 달리, 순탄하지 않았다. 그것은 최치원이 신라라는 변방국가 출신이란 사실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당나라가 이미 몰락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이국땅에서 먹고 살 길을 찾아 동분서주하던 최치원이 호남관찰순관 배찬(裵瓚)의 도움으로 간신히 율수현위(溧水縣尉)라는 종구품에 해당하는 미관말직을 얻은 것은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인 877년이었다. 이런 사정 속에서 최치원은 현재 쟝쑤성(江蘇省) 리쉐이현(溧水縣) 먀오샹(廟巷) 동쪽에 있는 성황묘의 옛터에 자리 잡은 아문(衙門)에 부임해 와서 4년 동안 머물렀다.
최치원은 율수현위로 있는 동안 복잡한 심리적 갈등을 겪었던 것 같다. 당시 그가 남긴 글은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미관말직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잘 것 없는 벼슬에 대한 불만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그는 자신의 벼슬에 대해 “봉급이 많고 벼슬이 한가로워서 배불리 먹고 편안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고 쓸 때가 있는가 하면 “녹봉을 먹고 살았다고는 하지만 빈한을 떨치지 못했다”고 쓰기도 한다. 또 자신의 벼슬을 가리켜 ‘말단 위관’, ‘먼지 속을 다니는 관리’라고 비하해서 말하면서 좀 더 나은 벼슬을 얻기 위해 장안에 가서 굉사(宏詞) 시험을 치고 싶지만 “녹봉은 남은 것이 없고 글 읽을 양식이 모자라”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도 쓰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말들로 보아 율수현위라는 말단 한직은 벼슬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지난 시절보다는 훨씬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결코 넉넉하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쌍녀분 양저우(揚州) 최치원기념관
쌍녀분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사전에 그 위치에 대해 나름대로 준비를 했음에도 초행길이라서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쌍녀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의외로 적었고 이가촌(李家村) 옆에 있다고 했지만 이가촌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낮은 야산과 벌판과 촌락이 이루는 비슷한 풍경도 너무 많아서 지형적인 특색으로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두 세 시간 동안 이곳저곳에 들르면서 기사와 서여명 군이 쌍녀분을 찾느라 노심초사 하는 동안 나는 최치원이란 사람이 걸어간 길, 한 뛰어난 지식인이 부딪힌 운명적 고난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당시의 신라는 당나라에 비해 훨씬 모순이 많은 사회였다. 신라사회는 부모의 혈통에 의해 개인의 운명이 결정되는 골품제(骨品制) 사회였기 때문에, 최치원처럼 뛰어난 지식인도 그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의 최치원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될 수 없었다.”라고. 이런 점에서 당시 세계제국인 당나라에서 일류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던 최치원으로서는 꽉 막힌 신라사회가 몹시 불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당나라에서 쓴 것으로 알려진 「추야우중(秋夜雨中)」이란 시를 잠시 내멋대로 생각해 보았다. “가을 바람은 오직 괴롭게 읊조리고/세상을 둘러보니 마음 통하는 사람이 많지 않네/지금 창밖에는 삼경의 비가 내리는데/등불 앞에서 내 마음은 만리 밖의 고향으로 달려가는구나”(秋風唯苦吟/擧世少知音/窓前三更雨/燈前萬里心)라는 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싶어졌다. 왠지 “세상을 둘러보니 마음 통하는 사람이 많지 않구나(擧世少知音)”란 구절이 신라로 돌아온 후의 그의 처지에 잘 부합하는 말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라사회는 세계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하여 돌아온 최치원을 적절하게 대우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이란 구절을 폐쇄된 신라사회에서 당나라 생활을 그리워하는 표현으로 읽고 싶어졌던 것이다. 쌍녀분은 넓은 벌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최근에 치원교(致遠橋)라 이름붙인, 들판의 수로 위에 놓인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자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이 봉분을 가리고 있는 쌍녀분이 보였다. 쌍녀분은 16살과 18살에 한(恨)을 품고 죽은 장(張)씨 자매를 묻은 곳이라 전해지고 있는 무덤이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번 늙은 소금 장수와 차 장수에게 큰 딸과 작은 딸을 억지로 시집보내자 두 자매가 한을 품고 죽어서 묻혔다는 곳이 바로 쌍녀분이다.
최치원은 율수현 현위로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을 시찰하던 중 당시 이 쌍녀분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역관(驛館)에서 유숙하게 되어 꿈에 장씨 자매를 만났다. 최치원이 먼저 “어느 집 두 여인이 버려진 무덤에 깃들어 쓸쓸한 지하에서 몇 차례나 봄을 원망했나요”라는 시구를 보내자 두 여인이 “살아 있을 때는 나그네를 몹시 부끄러워했는데 오늘은 알지 못하는 이에게 교태를 뿜도다”라고 답함으로써 그날 밤 최치원은 두 자매를 양 옆에 누이고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쌍녀분
[홍정선 교수]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4호(2014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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