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지현의 브라보 클래식]불행한 시대의 익살꾼 로시니

    입력 : 2014.02.28 16:10:29

  •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1792~1868)는 농담을 즐겼다. 밀라노시가 그의 동상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돈을 내게 준다면 매일 서 있을 수 있다”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어느 파티에 참석한 후 집주인이 “또 오세요”라고 인사하자 “지금이라도 좋을까요?”라고 물어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칠순 넘기고도 18세라고 우긴 익살꾼 칠순을 넘기고도 그는 18세밖에 안됐다고 우기기도 했다. 생일이 4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2월 29일이라는 게 이유였다. 유난히 미신을 맹신했던 그는 13일의 금요일에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토록 싫어하던 13일의 금요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코믹 오페라 같다.

    그는 심각하고 복잡한 것을 아주 싫어했다. 익살스러운 성격은 그의 오페라에도 고스란히 배여 있다.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내용을 유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선율에 담았다.

    그의 코믹 오페라는 1820~30년대 유럽인을 열광시켰다. 1789년부터 1794년까지 세상을 뒤흔든 프랑스혁명을 거친 후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혁명 이전 시대로 돌아가려는 보수 반동주의자들의 저항도 거셌다.

    개혁 피로감에 찌들어 있던 사람들은 골치 아프고 심각한 것보다는 가벼운 것을 찾았다. 그런 청중의 새로운 욕구에 딱 맞아떨어진 오페라가 바로 로시니의 작품이었다. 가볍게 웃을 수 있는 희극(오페라 부파)을 주로 작곡했다.

    1816년 로마에서 초연되어 유럽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도 희극이다. 로지나를 짝사랑하는 알마비바 백작이 세빌랴의 이발사이자 만능 해결사인 피가로의 도움을 받아 결혼에 성공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그 사랑을 가로막는 복병은 부모가 없는 로지나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그녀의 재산을 탐내는 바르톨로. 그의 방해로 난관에 부딪히지만 백작은 똑똑한 피가로의 도움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넘긴다.

    로시니는 이 작품으로 일류 작곡가 반열에 올랐다. 엄격한 소나타 형식을 오페라에 적용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표현했다. 또 콜로라투라 부분이 없는 아리아를 시도했으며 갈등을 상승시키고 해결하는 방식이 능숙했다. 큰 장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명확하게 구분시키는 특징도 이 오페라에 나타났다. 콜로라투라란 소프라노가 구슬을 빠르게 굴리는 듯한 발성을 이용하는 창법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로시니 오페라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나이 들면 화려한 보석이 좋아지는 것처럼 수려한 벨칸토 창법과 콜로라투라를 적용했다. 벨칸토란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노래를 의미한다. 극적 표현이나 낭만적 서정보다는 목소리 자체의 아름다움과 균등한 공명, 매끈한 창법에 중점을 뒀다. 그의 재능에 찬사를 보낸 선배 작곡가는 베토벤(1770~1827)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로시니를 만난 베토벤은 “당신의 오페라에 압도당했다. ‘세빌랴의 이발사’같은 대작을 계속 써달라”라고 당부했다.

    1823년 로시니는 파리를 거쳐 영국으로 갔다. 1년 정도 런던에 머물면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 후 이탈리아 극장 총지배인으로 취임했다.

    소프라노 어머니 덕분에 오페라에 일찍 눈 떠 로시니가 젊은 시절부터 재능을 떨쳤던 이유는 오페라 자체가 삶이자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중부 페사로에서 소프라노 어머니와 호른 연주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너무나 자연스럽게 음악을 시작했고, 6세에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쫓기듯 볼로냐로 이사해 안토니오 테제이에게 작곡을 배웠다. 12세에 현악4중주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하고 14세에 오페라를 만들었다. 이듬해에는 볼로냐 음악학교에서 첼로와 피아노, 작곡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하지만 지루하고 딱딱한 수업을 못 견뎌 학교를 그만뒀다. 대신 혼자 모차르트와 하이든 작품을 연구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가수와 가정교사, 극장 반주자로 일하며 교향곡과 미사 칸타타를 작곡했다. 18세가 된 1810년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결혼 어음’을 발표하면서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오페라 ‘탄크레디’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 성공하면서 그의 명성은 이탈리아 전국에 퍼져나갔다.

    그 성공에 힘입어 작곡 의뢰가 물밀듯 들어왔다. 20대에 작곡가뿐만 아니라 극장장과 지휘자로도 활약하며 쉴 틈 없이 분주하게 살았다. 짧은 시간에 다작을 해내다 보니 악보에 오류가 많았다. 하지만 천성이 낙관적이던 로시니는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페라 주문을 6주 전에 받았다. 4주는 실컷 놀면서 구상하고, 다음 주는 아리아와 중창을 쓰면서 보내고 마지막 주에 관현악으로 맞춘 다음 당장 리허설로 간다”고 뻔뻔스럽게 대응했다.

    ※ 42호에서 계속...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2호(2014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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