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정선 교수의 중국문명 기행]⑤ 중국의 역사인가, 이민족의 역사인가?

    입력 : 2014.02.28 16:10:23

  • 어얼둬쓰(鄂爾多斯) 징기스칸릉 대문
    어얼둬쓰(鄂爾多斯) 징기스칸릉 대문
    어얼둬쓰(鄂爾多斯) 징기스칸의 동상
    어얼둬쓰(鄂爾多斯) 징기스칸의 동상
    내가 베이징을 처음 찾았을 때 당혹스러웠던 일은 자금성을 비롯한 여러 유적지의 현판과 비문에서 마주친 이상한 문자들이었다. 일찍부터 중국의 역사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베이징이란 도시가 한족의 수도였을 때보다 이민족들의 수도였던 때가 더 많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나는 당혹스러웠다.

    한자와 만주문자와 몽골문자, 이 세 가지 문자로 씌여진 현판과 비문들은 나에게 베이징이란 도시가 만주족이 세운 대청제국의 수도였다는 사실과 함께 청 제국이 초창기에 몽고와 연합하고 동북지방의 한족을 복속시키면서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또 베이징이 몽고족의 원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선비족 모용씨(慕容氏)의 연나라 등의 수도였다는 사실도 환기시켜 주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문득 역사적으로건 지리적으로건 베이징은 제국의 수도라는 사실을 깨달았었다. 남경의 위치가 한족의 수도로 적당하다면 북경의 위치는 제국의 수도로 적당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제국이다. 광대한 영토 안에 다양한 민족, 언어, 풍속, 문화를 가진 국가를 제국이라 부른다면 중국은 분명히 제국이다. 그렇지만 중국은 미국과 다른 제국이다. 미국도 중국처럼 다양한 인종과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제국이다. 그것은 미국이 중국처럼 제국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 많기 때문이다. 중국은 수천 년 전부터 중국 땅에 존재해 온 제국의 역사를 이어받고 있지만 미국에는 그런 역사가 없다.

    중국 땅에서 명멸한 제국으로는 춘추전국 시대를 끝낸 대진제국을 비롯하여, 대한제국, 대당제국, 대원제국, 대명제국을 거쳐 대청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제국이 있다. 그리고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지난 시절 중국에 건설된 이러한 제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삼아 성립하여 기능하는 국가이다. 서양의 학자들이 마오쩌둥 집권 당시의 중국을 가리켜 과거의 황제국가와 차이가 없다고 말했던 이유는 이 같은 사정과 관련이 있다. 그 서양학자의 눈에 비췬 마오쩌둥의 중국은 나라의 이름이 바뀌고 황제라는 명칭이 달라졌을 따름이지 통치의 방식에서는 과거와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나라들과 관계를 맺고, 영토를 관리하고, 국민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마오쩌둥의 중국은 민주주의라는 서구적 제도보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더 중요시하는 것으로 비췄다.

    거듭 말하지만 중국은 제국이다. 중국의 영토는 동쪽은 연해주로부터 시작하여 서쪽은 파키스탄에 닿아 있고, 남쪽은 아열대의 미얀마 접경으로부터 북쪽은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시베리아에 이르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나라의 50배가 넘는 이 광대한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지금도 복잡하지만 과거에는 더욱 복잡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변경의 유목민족들은 때로는 식량을 찾아 때로는 자기 민족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중원으로 밀려왔었고, 중원의 한족은 난세(亂世)에 살길을 찾아, 치세(治世)에는 팽창하는 제국의 정책에 의해 끊임없이 변경으로 밀려갔었다. 예컨대 수많은 민족들이 교차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융합하는 5호 16국 시대를 거쳐 성립한 당 제국이 동쪽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의 ‘안동(安東)’과 서쪽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의 ‘안서(安西)’라는 명칭이 붙은 도호부를 동쪽과 서쪽에 설치한 것은 역설적으로 국경 문제가 무척 복잡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국경문제가 얼마나 골치 아프고 복잡했으면 이 같은 명칭까지 만들어 붙였겠는가!

    인촨(銀川) 서하왕릉 유적
    인촨(銀川) 서하왕릉 유적
    이민족이 확장한 중국의 땅 중국이 가진 현재의 영토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영토가 그 원형이다. 강희제와 건륭제 같은 정력적인 이민족 황제들이 동서남북을 누비면서 현재의 영토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대청제국은 동북지방을 근거지로 시작하여 몽고를 복속시켜 우군으로 삼은 후 중원지방을 정복했다. 그리고 신강위구르 지역과 티베트와 타이완까지 제국의 영토를 확대함으로써 현재의 중국지도를 완성시켰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을 지배한 원 제국과 청 제국, 이민족이 세운 두 개의 정복왕조는 중국의 영토를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원 제국은 운남지방을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켜 주었으며 청 제국은 동북지방과 내몽고와 신강위구르 지역 등을 중국영토로 만들어 주었다. 이렇듯 중국 땅에서 명멸한 제국의 역사, 한족과 이민족이 세운 제국의 역사 때문에 중국의 역사는 복잡하며, 그 역사가 현재에도 여러 가지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를테면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다. 중국에서 온 유학생과 몽고에서 온 유학생이 기숙사의 같은 방을 사용한 적이 있는데 이 두 학생이 너무 심하게 싸워서 결국 방을 재배정 한 사건이었다. 사건은 징기스칸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언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학생은 중국의 영웅이라고 주장했고 몽고학생은 몽고의 영웅이라고 주장한 말싸움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 말싸움은 더 발전하여 중국 학생은 현재 중국에 속한 내몽고자치구뿐만 아니라 외몽고 지역까지 중국 땅이라 했고, 몽고 학생은 중국이 부당하게 자기들 땅인 내몽고를 가로챘다고 하는 단계로 비화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먹다짐이 벌어졌다.

    현재의 중국은, 이 사건이 상징적으로 말해주듯, 과거에 중국을 정복했던 수많은 이민족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공식화시켰다. 이를테면 자신들이 정복한 한족을 하등민족으로 취급하며 민족차별을 공공연하게 자행했던 몽고족의 원나라도 마찬가지다. 송나라에게 지울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면서 해마다 엄청난 공물을 챙기던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도 적국이 아니라 중국 내부의 왕조라는 입장을 정립했다. 이처럼 중국이 현재의 중국 땅 위에서 벌어진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로 간주하는 입장을 정립시킨 결과 유학생 사건에서 보듯 중국은 우리나라, 몽고, 베트남 등 주변국들과 불편한 역사분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에 대한 현재의 해석이다. 역사는 사실의 지루한 열거나 두서없는 나열이 아니라 일정한 관점에서 조직적으로 사실을 해석하여 서술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E. H. 카는 역사를 가리켜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해석 사이에서 역사는 긴장의 끈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과거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서이며 현재에 유용한 어떤 교훈이나 사례를 찾기 위함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은 늘 현재적인 의미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현재적 필요가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거나 바꿀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 42호에서 계속... [홍정선 교수]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2호(2014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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