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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 교수의 중국문명 기행] ③ 한족이라는 용광로 그리고 소수민족의 운명
입력 : 2014.01.03 16: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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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국 고대문명의 본산인 중원지역을 여행하면서 나는 “중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찬란한 고대중국문명의 옆에서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현재의 중국 때문에 “중국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린 것이다. 중국 성씨의 뿌리는 황제(黃帝)라는 이념을 강조하며 거대한 규모로 확장해 놓은 서안의 황제릉(黃帝陵) 앞에서, 중국인은 모두가 염황(炎黃)의 자손이란 이데올로기를 사실화하기 위해 세계 최대의 규모로 조성해 놓은 정저우(鄭州)의 염제(炎帝)와 황제(黃帝) 조각상 앞에서 나는 중국인의 뿌리 문제에 대한 질문을 회피할 수가 없었다. 최근 정저우에 갔을 때 내가 지난 2000년대 말 한국과 중국 사이에 있었던 신화문제를 떠올린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분쟁은 이런 것이었다. 중국 사회과학원 비교문학연구센터의 예수셴(葉舒憲) 주임을 비롯한 일단의 학자들이 『곰토템, 중화민족의 시조신화 탐원(熊圖騰中華祖先神話探源)』이란 책을 간행하면서 단군신화가 한족(漢族)의 시조인 황제 집단의 곰토템에서 기원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들 중국학자들은 “곰토템은 황제 집단에서 시작되어 후대로 이어졌고 고대 퉁구스인과 가까운 종족군의 전파 작용으로 조선족의 옛 기억 속에 뿌리를 내려 지금까지 완전한 형태의 웅모생인(熊母生人) 신화를 남겨놓고 있다”고 서술함으로써 마치 우리 단군신화의 뿌리가 중국 ‘황제족’의 ‘곰토템’인 양 서술했던 것이다.
중국 측의 이 같은 연구에 대해 한국의 학자들은 고대 문헌이나 구비전승에 황제족의 곰토템과 관련된 신화나 전설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에 참여한 중국학자들의 그러한 서술은 ‘동북공정(東北工程)’에서 보여준 광범위한 역사왜곡 시도와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고 맞섰다.
필자는 이 같은 학술적 분쟁에 대해 그 진위여부를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분쟁이 “진정 과거가 어떠했던가?”란 지적 탐구욕보다는 현재의 어떤 정치적, 문화적 필요성이 만들어낸 비생산적 분쟁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위에서 부터)뤄양 망산 발굴된 무덤, 황제릉 측백나무, 운강석굴
중국에서는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원류가 바로 화하족이라 설명하고 있었다. 화하족은 삼황오제에 속하는 황제와 신농(神農)씨의 후손으로 기원전 1046년 주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를 중화(中華)라고 자처하면서, 주변 이민족들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나라와 한나라로 이어지면서, 화하족은 한족으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최근 중국 과학원 소속의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발표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의 관계에 대한 연구결과이다. 이 연구소의 분석팀이 15년 동안 진행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중국인의 유전자는 무이산(武夷山)과 남령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쪽 한족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중원지역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들어서면 무력으로 남쪽을 정벌하고, 이민족의 침략이 발생하면 한족이 남쪽으로 이주하는 역사가 되풀이 되었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들이 정치적·문화적으로 우월한 상황에 있는 한족을 흉내 낸 결과 이 같은 양상이 벌어졌을 것이다.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처지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되기 위해 한족을 자처하고, 중앙 정권도 소수민족을 복속시키는 방법으로 한족화를 묵인하고 장려한 결과가 지금처럼 절대 다수의 한족인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중원지역을 침략하거나 지배한 이민족은 무수히 많다. 흉노족, 돌궐족, 선비족, 거란족, 사타족, 몽고족, 여진족 등 수많은 이민족들이 일시적으로 혹은 상당기간 동안 중원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월한 문화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의 바다에서 녹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모태가 되는 북위를 건국한 탁발 선비족이 그러했고, 중국의 영토를 획기적으로 넓혀준 몽고족의 원나라와 여진족의 청나라가 그러했다. 소수의 인구로 중국을 정복한 이민족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상실하고 한족에 편입되었으며, 자신들의 영토마저 한족의 땅으로 바뀌는 결과를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 같은 사실을 두고 미국의 헨리 키신저는 최근의 저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바 있다.
“중국의 근본적인 실용주의를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은 정복자들에 대한 반응이었다. 중국이 외부의 왕조들에게 전쟁에서 패하는 경우, 중국의 엘리트 관료들은 정복자가 차지한 이 땅이 너무나도 방대하고 독특해서 중국 방식, 중국 언어, 중국의 기존 관료체제 등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통치할 수 없으리라는 논리로써 그들에게 봉사하겠노라고 나서거나 설득하려고 했다. 세대가 지나면서 중국을 정복한 민족들은 그들이 지배하려 했던 체제와 질서에 조금씩 동화되어 가는 스스로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다가 애초 침략의 시발점이었던, 그들의 본국영토는 결국 중국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복계획 자체가 완전히 뒤집혀 자신들이 오히려(피정복자인) 중국의 전통적 이해관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민족(nation)이란 개념은 근대적 산물이지만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民族)’이란 말은 근대적 개념과 다르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근대적 민족 개념은 민족과 종족을 구분하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양자가 구별되지 않는 개념으로 민족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민족의 표시를 신분증에 명시하고 있다. 그 결과 이런 구분은 화이사상의 연장으로 소수민족에게 작용하고 있다. 세계를 중화와 외부의 이적(夷狄)으로 구분하고 이적에 대한 덕화(德化)·한족화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측면이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행정구분에서 소수민족이 인구상으로 다수를 점하고 있는 지역은 많지 않다. 내몽고자치구, 신강위구르자치구, 연변조선족자치주 등은 이미 한족의 인구수가 소수민족의 인구수를 넘어선지 오래다. 그렇지 못한 지역은 환경상 한족이 거주하기 어려운 티베트 지역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화이동근(華夷同根)이라는 포용적(?) 발상 아래 다민족국가임을 용인하면서도 한족화를 비밀리에 진행시키던 과거의 대한족주의는 지금도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0호(2014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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