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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XMEN 칼럼] 총수 수난시대 유감
입력 : 2014.01.03 15: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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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애플의 아이팟 같은 혁신적 제품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잭 웰치 전 GE회장) “무엇하면 한국하고 떠올릴 만한 특별한 분야가 없다”(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한국을 얕잡아보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기분 상하는 얘기다. 그런데 세계 최고 반열의 경영대가와 석학으로 꼽히는 분들의 말씀이니 토를 달기도 껄끄럽다.
되짚어보면 왜 한국에 그런 혁신적인 제품, 특별한 분야가 없었겠는가. 노비 출신 장영실이 개발한 측우기나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는 한국인이 독창성 유전인자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수백년간 조선사회를 지탱해온 사농공상에 밀려 그런 유용한 DNA가 퇴화됐을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10년 만에 되풀이된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벗어났다. 한국은 세계 1등 제품도 수십개 갖고 있다. 그런데도 잭 웰치와 앨빈 토플러의 지적은 한국이 처한 현재 상황의 핵심을 파고 들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이 최근 50년간 경제성장기에 문명의 한 획을 긋는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선도기업을 모방·재해석해 따라잡는 ‘재빠른 추격자’ 수준에서 오늘의 경제 발전을 일궈냈다는 한계를 콕 집어내고 있어서다.
기업의 소유형태와 기업 성장간 관계를 따지는 분석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답은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일관된 답은 없다. 소유경영인과 전문경영인 소유구조가 제각각 장단점이 있고 결과도 중구난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삼성전자의 성공 사례를 놓고는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바로 빠른 의사결정과 추진력이 성공 요인이라는 것이다.
삼성전자 수원공장(삼성디지털시티)에 위치한 홍보관에는 반도체 산업에 첫발을 내디딜 당시 고 이병철 회장이 정부의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시간을 다퉈 밀어붙였다는 대목이 있었다. 정부를 자극했다고 봐서인지 언제부턴가 그 문구는 사라졌지만…. 잭 웰치도 “의사결정이 늦어서 문제된 적은 많아도 빨라서 문제가 된 사례는 드물다”고 말했다.
지금은 기업 총수들의 수난시대다. 조석래 효성 회장은 분식회계와 탈세, 비자금 조성 혐의로 일생 일대 위기를 맞고 있다. SK, 한화, CJ, 태광산업, LIG 회장은 구속 또는 형집행정지 상태에 있다. 한국 기업의 장점인 빠른 의사결정은 이들 그룹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총수 부재로 이미 곳곳에 구멍이 나있다. 신규사업 진출이나 굵직한 투자는 일체 보류되거나 포기 상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보신주의가 해당 기업에 팽배해 있다고 걱정이다. 초대형 기업 매물이 줄줄이 대기 중이지만 예전 같으면 M&A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을 법한 곳들마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 빈자리를 되팔기에 능숙한 사모펀드(PEF)들이 파고들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일자리 창출도, 투자도, 창조경제도 뒷전이다.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은 시늉에 그치는 분위기다. 싫든 좋든 그게 경제 돌아가는 이치다. 경영이 어려워져 다른 곳에 인수되면 주인만 바뀌는 것 아니냐는 인식은 너무 안이하다. 상당수 임직원은 그 과정에서든, 팔린 이후에든 보따리를 싸야 한다.
시시비비는 가리자. 2세에게 기업을 물려주기 위한 일감 몰아주기, 지분 늘리기를 위한 회삿돈 횡령, 지불능력이 없는 어음 발행 등은 기업인 최대의 악행이다. 기업도 불법탈법을 원천적으로 멀리하는 관행이 조속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러나 ‘죄있는’ 기업인이라도 민심을 달래는 수단으로 과용돼서는 안 된다. 법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
때론 사법부도 여론과 사회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도주나 증거인멸과는 관계없이 일단 잡아넣고 보자는 식은 자제돼야 한다. 검찰이 표적 기업 총수를 고를 때도 가족 내분, 사회적 지탄을 받을 만한 행태와 같은 허점 있는 곳을 우선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상식이다. 본질보다 곁가지를 중시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1988년 인질범 지강헌이 내뱉은 ‘무전유죄 유전무죄’는 한국인이 말한 사자성어로는 처음으로 중국 사전에 등재됐다고 한다. 이보다 더 정의를 강조한 말도 드물다. 그렇다고 ‘유전유죄’를 넘어 ‘유전중죄’가 돼서는 곤란하다. 신발끈을 다시 매는 새해에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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