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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⑭ 깊은 가을밤 재즈페스티벌에서 돌아오며
입력 : 2013.12.20 10: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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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아직도 여름이면 록페스티벌도 가곤 한다. 그것도 딸과 함께. 물론 그 고성능 스피커로 전해지는 소리의 광란에 날뛰는 젊은이들 속에 섞여서 ‘여기 최고령자를 뽑으면 내가 한 자리 할 걸’하고 중얼거리기는 하지만.
재즈페스티벌이 열리는 자라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쯤이었다. 입장권이 매진된 자라섬은 이미 사람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럼에도 놀란 것은 관객들의 성숙도였다. 올해로 10회를 맞는 페스티벌이라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싶어 찾아간 공연은 ‘나윤선 & 울프 바케니우스 듀오’였다. 그 공연을 보고 싶었던 것은 콘서트홀이라는 실내공간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나윤선의 가창력과 그녀 특유의 무대 장악력 그리고 노래 중간 중간에 끼어 넣던 이야기들 때문이다. 또 그 느릿느릿하면서 마치 둘이 마주앉아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던 그녀의 이야기들이 드넓은 야외공연장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광장에 담요를 깔고 스폰서회사에서 제공해 준 종이 시트에 기대앉아서 딸과 함께 치킨도 우물거리고 아이스크림도 핥으면서 붉게 물드는 가을 밤하늘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지 뭐, 이런 게 사는 즐거움이라는 거지 뭐’ 그런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릴 수 있었고, 어둠이 깔리면서 시작된 나윤선의 무대를 지켜보며… 나는 내내 행복했다.
나윤선의 공연이 끝나자 우리는 서둘러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가평역 옛 역사 앞 광장에서 열리는 스웨덴 출신의 첼리스트 랄스 다니엘손과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의 듀오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공연은 10시 30분부터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 우리는 식당을 찾아 옛 가평역사 앞거리를 걸었다. 간판도 건물도 낯선 거리지만 그러나 결코 낯설 수 없는, 추억이 안개처럼 휘몰리는 거리였다. 내가 말했다.
“가평 여기가 아빠 엄마한테는 중요하고 특별한 곳이란다.”
“뭔데요? 아빠.”
“그건 갈 때 이야기하자.”
춘천교육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나서 올해로 48년을 산 부부가 우리였다. 그 부부가 열아홉 살 젊디젊던 그때 대학교정을 벗어나 처음으로 갔던 춘천 아닌 도시가 가평이었다. 춘천에서 떠나는 막차를 타고 서울로 가다가 서울서 내려오는 막차를 타고 돌아오자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해서 막차를 기다리기 위해 밤에 내렸던 도시가 가평이었다.
기타와 첼로가 현란하게 어울려 춤추며 때로는 자지러지면서 공연을 끝냈을 때는 12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남한강가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두어 번 “아빠, 졸리지 않아요?”하고 물었을 뿐, 피곤했던지 딸아이는 말이 없었다. 서른을 넘겼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딸과 재즈페스티벌을 다녀가는 밤 깊은 길,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오늘이 또 추억이 되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작곡가 길옥윤에게 자장가를 부탁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제는 ‘길옥윤이라는 작곡가가 있었다’고 말해야 할 그런 시대가 되었다.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지나 작곡가 길옥윤이 잊혀지기 때문이다. ‘서울의 찬가’만이 아니다. 패티 김이 부른 노래로나 알고 있을 뿐 ‘이별’이나 ‘1990년’의 작곡가로 그를 아는 이들이 이제 몇이나 될까. 길옥윤과의 몇 번을 만남을 떠올리자면 그 만남 속에 감싸인 후회가 하나 있다. 우리는, 내가 자장가 가사를 짓고 그가 작곡을 하자는 약속을 했었다. 나로서는 작사를 새로 할 필요도 없었다. 평생 노래방을 가 본 적이 3번밖에 없는 악성음치인 내가 작사, 작곡으로 불러대는 자장가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가사를 끝내 그에게 전해 주지 못했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을 결코 잊지 않은 그는 10여 년 후 우연히 만났을 때도 “한 형, 자장가 가사는 언제 주실 겁니까”하고 물었다. 딸아이가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에 한 약속을 고등학생이 된 그때까지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약속을 지켜서 아버지가 가사를 쓰고 길옥윤이 곡을 붙인 자장가 하나를 남겨 주었으면 얼마나 좋은 선물이 되었을까. 후회 아닌 후회를 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딸아이는 시트를 젖히고 잠이 들어 있었다.
‘무언가를 후회하는 것은 그때 혹은 거기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어느 일본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사랑이 있었기에 뒤돌아보며 후회라는 괴로움도 남는다는 말에 나도 동의했었다. 돌이 안 된 딸아이를 데리고 내려가 3년을 살았던 제주 시절을 생각했다. ‘한수산 필화사건’이라는 덫에 걸려 삶의 모든 의미를 내려놓고 지내던 때여서 더욱 그랬다. 제주 해변에서 돌멩이를 주워가며 얼마나 많이 소꿉장난을 했던가. 한라산 중턱의 천왕사 숲을 찾아가 하루 종일 거닐던 나날도 그때였다. 밤이 깊어가는 한라산 길을 내려오자면 잔칫집처럼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떠 있던 제주 앞바다는 왜 그렇게도 캄캄했던가. 너무 어렸기에 그런 날들을 딸애가 기억할 리도 없겠지만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건 내가 딸애에게 해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그 아이 덕에 위안을 받고 치유되던 시기였다. 그것은 그녀가 오히려 아버지에게 베풀어준 아름다움이고 평화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 허무가 안개처럼 길에 깔리면서 눈앞이 흐려져 왔다. 아버지로서의 내 생애는 얼마나 졸렬한가 하는 비애까지 거기 덧씌워졌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만남, 그 만남이 어떻게 우연일 수 있는가. 그러나 모든 생명의 탄생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듯이 또 자신의 선택 일 수 없이 죽는다. 모든 생명은 그렇게 세상을 떠난다. 또 하나의 생명을 만들어서 이 세상에 살다가 가게 하는 게 자식 기르기라면… 잠깐 잠깐의 기쁨이야 있겠지만 별놈의 개고생 다하며 이 세상을 살다가 끝내는 죽게 만든, 자식을 낳는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가 떠난 후, 그 어느 날 우리의 자식들도 저 죽음이라는 끝 모를 어둠의 심연으로 사라져가야 하는 것을. 이것이야말로 내가 살며 저지른 가장 큰 죄악이 아닌가. 용서받을 수 없는, 돌이킬 수는 더더욱 없는.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8호(2013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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