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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매혹하는 도시 `長安`
입력 : 2013.12.12 13:4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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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西安)을 찾는 사람은 꿈꿀 줄 알아야 한다. 지금의 시안이 아니라 과거의 ‘장안’을 상상하면서 몽상에 잠길 필요가 있다. 아마도 한국사람 중 현대 도시의 매력을 찾아 시안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안은 최근에 살았던 어떤 인물로 유명한 곳도, 마천루나 에펠탑으로 소문난 곳도 아닌 까닭이다. 그곳은 아득한 세월 저쪽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 여행하는 곳이며, 그들이 남긴 흔적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추며 돌아다닐 곳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시안은 낡고 쓸쓸하고 수많은 무덤과 폐허를 거느린 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번성에서는 상하이에 뒤지고 남아 있는 역사적 건축물의 온전함에서는 베이징에 뒤지는, 서부의 촌스러운 도시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시안지역 사람들의 자부심인 진(秦)제국, 한(漢)제국, 당(唐)제국은 다른 무엇보다 관중평원이 지닌 자연조건과 농업경제의 발전이 만들어낸 국가들이다. 이 사실에 대해 도리야마 기이찌(鳥山喜一)라는 일본학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관중평원에서 “한족의 농업이 빠르게 발전한 것은 황토지대의 지질 특성상 우거진 삼림이 형성되지 않아 개척하기가 쉽고, 약간의 수분만 있어도 비옥한 농경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농업에 있어서는 축복받은 지대였던 것이다.”
시안이 자랑하는 영화는 황토지대가 선물한 것이며, 그랬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시안의 북쪽에 자리 잡은 황토지대의 농민들은 지금도 변함없이 동굴집에서 가난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시안은 과거의 영화와 몰락을 머릿속에 그릴 줄 아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도시라 할 수 있다. 시안은 호화로운 아방궁(阿房宮)에 담긴 욕망과 미앙궁(未央宮)에 깃든 팽창하는 기세, 대명궁(大明宮) 앞으로 펼쳐진 세계 제일 도시의 번성하는 모습을 상상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매혹적인 도시이다. 시안은 주머니의 돈을 세는 현실적인 인간을 사로잡는 도시가 아니라 과거를 상상하는 인간, 기억을 소중히 여기며 꿈꾸는 인간을 매료하는 도시인 것이다.
나에게 시안, 아니 ‘장안’은 오랫동안 중국의 대명사였다. 서쪽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시안’이란 이름에는 그곳을 변방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구석이 있지만 나에게 시안은 단순히 변두리 지방이 아니라 늘 번영하는 중국의 수도였다.
첫 번째 이유는 장안이 몰락한 이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울을 ‘장안’이라고 부르는 습관에서 알 수 있듯 서울이란 말의 보통명사로 여전히 살아있는 탓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어릴 때 한글을 모르는 어머님께 읽어드린 <구운몽>때문이다. 어머님이 무척 좋아했던 <구운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취미궁 서녘에 높은 대 있으니 그 위에 오르면 팔백리 진천을 손바닥 금 보듯이 하여 가린 것이 없으니 승상이 가장 사랑하는 땅이더라.” 여기에서 ‘팔백리 진천(八百里秦川)’이란 바로 장안이 위치한 관중분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 이 대목의 바로 뒤에는 주인공 양소유가 장안의 취미궁에서 진천 풍경을 바라보며 “북으로 바라보니 평평한 들과 무너진 언덕에 석양이 시든 풀에 비친 곳은 진시황의 아방궁이요, 서로 바라보니 슬픈 바람이 찬 수풀에 불고 저문 구름이 빈산을 덮은 데는 한 무제의 무릉이요, 동으로 바라보니 분칠한 성이 청산을 둘렀고 붉은 박공이 반공에 숨었는데 명월은 오락가락하되 옥난간을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이는 현종황제 태진비로 노니던 화청궁이라”라고 말하는 대목이 이어진다. 이렇듯 <구운몽>을 읽는 동안 나에게 장안이야말로 세상의 다른 어떤 곳보다 삶과 죽음에 대해, 또 영화로움에 관한 인간의 욕망과 그 부질없음에 확실한 증거를 가진 장소가 되었다. 내가 1990년대 초에 이태백의 「장진주(將進酒)」와 「소년행(少年行)」을 떠올리며 시안을 찾은 것도 현재의 시안보다 과거의 ‘장안’에 사로잡혀서다. 백만 명이 넘는 인구와 다양한 민족의 종교와 풍속, 놀이를 자랑하던 장안의 거리에서 삶의 의미를 물으면서 이태백은 이렇게 썼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황하의 강물이 하늘에서 흘러와/ 바삐 바다로 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君不見/黃河之水天上來/奔流到海不復廻)”이라고. 그러면서 이어서 “또한 보지 못하였는가/마루의 거울에 비친 백발의 슬픔/아침에 검던 머리 저녁에 희었다네(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朝如靑絲暮如雪)”라고. <구운몽>에서 ‘출장입상(出將入相)’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 출세와 부귀영화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그 허망함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없애버릴 수 없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욕망은 떨쳐버릴 수 없는 유혹이란 사실을 <구운몽>이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태백은 젊은 나이에 출세보다는 즐김을 강조하는 이 같은 시를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기쁨이 있으면 마음껏 즐겨야지 금잔에 공연히 달빛만 채우려나(人生得意須盡歡/莫使金樽空對月)”라고 그가 권주가를 노래한 것은 당시의 장안에 넘쳐흐르던, 잘 나고 출세한 인간들의 호사스러움과 거들먹거림에 일찌감치 질려버린 탓일까? 그래서 이태백은 장안의 명문세가 청년들이 호화롭게 장식한 말을 타고 이란 쪽에서 온 서역 미녀들이 시중드는 술집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소년행」에서 “은(銀) 안장을 한 백마를 타고 봄바람을 맞으며 달려가서(銀鞍白馬度春風)/(.......)/웃으며 호희의 술집에 들어간다(笑入胡姬酒肆中)”고 썼던 것인가?
(위)한무제 무릉, (아래)청진대사 시안
청진대사의 낡아빠진 목조건물 난간에 기대어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알 듯 모를 듯한 사람들이 코란을 읽는 소리를 들어보아야 하고, 대안탑을 돌면서 한자의 뜻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무아미타불을 웅얼거려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이 길을 걸어간 사람이 남긴 “뒤에 오는 사람이 어찌 앞서간 사람의 어려움을 알겠는가!(後者安知前者難)”라는 말의 의미를 헤아려 보고, 한 문명과 다른 문명의 만남,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바뀌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한다. 나는 당나라 때 목조 건축물로는 유일하게 그 자리에 건물이 유지되고 있는 중수와 확장을 거쳐 웅장한 규모로 발전한 청진대사의 경내를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예나 지금이나 청진사를 싸고 있는 번잡한 골목과 가게, 인파를 헤집고 다녔다.
실크로드를 건너오고 있는 호희와 그녀들이 추는 호선무(胡旋舞)를 떠올리고 문득 불경스럽게도 불교의 비천상과 호선무를 추는 여인들이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술집에서 춤추는 여인과 불교의 천사를 동일시하는 생각을 경계하면서도 잔혹한 일면을 지닌 측천무후의 얼굴이 인자한 부처의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 용문석굴을 상기하며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생각을 했다. 극락을 본 적이 없는 인간이 황제가 사는 궁궐을 극락의 모습으로 그려놓고, 자기민족의 얼굴과 복장으로 부처의 모습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인간의 능력 도달치 인 것이다.
모란꽃을 즐기는 장안의 인파, 호희를 찾아 하룻밤의 즐거움을 사는 장안의 청년, 진지하게 새로운 문명을 찾아 서역으로 떠나는 지식인, 돈과 이익을 찾아 먼 길을 달려가는 상인들에 대해 상상했다. 계속된 생각에 지친 나는 서봉주(西鳳酒) 한 잔에 피로를 풀기로 마음먹으며 발길을 술집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청소년 시기부터 외웠던 왕유(王維)의 시 구절을 나직이 입속으로 읊조려 보았다.
“그대에게 다시 한 잔의 술을 권하노니/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술 권할 친구가 없지 않은가(勸君更進一杯酒/西出陽關無故人)”
어느 봄날 위하의 강변에서 실크로드로 떠나는 친구와 작별의 술을 마시던 왕유처럼 나 역시 시안에서 그 기분에 푹 젖어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9호(2013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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