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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⑮ 망할 듯이 망할 듯이 망하지 않는
입력 : 2013.12.12 13:4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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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마흔 살이 되면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로맨스가 있을 것이오!”
이 무슨 행운의 날벼락인가. 평생 점이라곤 쳐 본 적이 없는 나였는데도 로맨스라는 말에 홀라당 미쳐 버렸다. 설레는 가슴으로 귀국한 후, 이 사실을 아내는 물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나는 마흔 살이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마흔이 된 그해, 오늘일까 내일일까 남몰래 실실 웃으면서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았다. 가능한 한 옷차림도 깨끗이 했고 열심히 구두도 닦아 신으면서 가을을 보냈건만 로맨스는 ‘아직’이었다. 그렇게 연말을 맞았고 마흔을 넘겨 버렸다. 그러나 로맨스의 꿈을, 그 끈을 놓을 수 없던 나는 생각했다. 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마흔일지도 몰라. 점쟁이니까 음력으로 세월을 세지 않겠어. 그러나 음력 마흔도 속절없이 가 버리고… 마흔둘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누구에게인지 모르게 ‘미친 놈!’하고 중얼거렸다. 그게 나 스스로인지 아니면 인도의 그 점쟁이 녀석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흔이 된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서적 안정을 의미했다. 세상이 무언지 짐작이 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이나 의욕이 넘쳐 무서울 게 없었던 삼십대의 정서를 벗어날 수 있는 나이, 그것이 사십대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쯤 되면 감정의 격랑도 가라앉고 정서적 혼란도 자리를 잡아 삶을 따스하게 바라볼 수 있으며, 삶을 둘러싼 많은 것들에 이해의 눈이 뜨인다. 또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가슴을 기울여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적인 것이 선명해지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사십대가 되면 우리의 역사도 이해되고 용서될 줄로 알았다. 조선왕조 후반부의 그 지리멸렬함에 깊은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고 민족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지 못한 시대의 어리석음 에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무겁던 나였다. 특히 우리의 전통문화, 그 중에서도 음악이나 미술을 이해하고 사랑에 젖어서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무럭무럭 피어날 줄 알았다. 요즈음은 많이 달라졌지만 도대체 그 무렵 학교를 다닌 우리 세대는 음악도 음악가도 서양음악 일색이었고 미술 또한 그랬다.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 ~ 1759)은 이름도 모르면서, 어린 내 눈에는 마치 사람 비웃는 것만 같았던 모나리자의 미소나 졸졸 외워야 했던 세대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믿고, 세월이 흘러 사십대가 되었다. 그러나 마흔을 넘겼지만 내 민족의 역사는 물론 그 문화에 대한 이해도 사랑도 좀처럼 우러나지 않는 것을 어쩌랴. 더 기가 막힌 것은 오히려 알면 알수록, 살면 살수록 우리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실망감이 더 늘어나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의 일이었다. 존경하는 윗세대의 언론인이나 학자들을 가깝게 알고 모시게 되었을 때 한결 같이 듣는 말이 있었다. 이 나라가 ‘곧 망할 것 같으면서도 절대 망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망할 것 같으면서도 결코 망하지 않는 나라 그것이 한국이다. ‘망할 듯이 망할 듯이 망하지 않는 나라’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그렇게 시작하는 한정동 작사 윤극영 작곡의 동요 <따오기>도 아니고 ‘망할 듯이 망할 듯이 망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니. 한 나라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지도자인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그랬다. 그 후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참 나쁜 나라로구나’ 생각하게 하는 일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한 건 조금 더 불행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아주 작고 가벼운 것에서 ‘나쁜 나라’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인도가 없는 길’이었다.
아직도 그런 길이 전국에 무수히 깔려 있다. 길을 닦으면서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인도를 만들지 않고 차도만 만들어 놓는다. 설마?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번 자신이 차를 몰고 다니는 길을 살펴보기 바란다. 인도를 만들지 않은 2차선 도로가 논밭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마을을 뚫고 지나가고 있다. 사람은 어디로 걸어가라는 것인가.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공간 없이 길을 닦는 나라, 이게 나쁜 나라가 아니고 무엇인가.
인도가 없는 길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커녕 그 어떤 배려도 존재하지 않는다. 길을 그 모양으로 닦는 나라에서 무슨 인권에 대한 인식을 찾아보겠는가. 그러다보니 무책임한 선거공약들이 난무하고, 인도 없는 길을 닦고 그 길을 아슬아슬 걸어가며 살아가니 그런 선거공약들도 용인되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시장 선거에서 여성들의 안전한 귀가를 위해 집 앞까지 가는 귀가버스를 운행하겠다고 내건 후보가 있었다.
공약을 살펴보면, 늦은 밤 한 사람 한 사람을 집 앞까지 데려다 주는 귀가버스를 서울시에서 운행하겠다는 것이다. 광화문에서 출발한 귀가버스가 미아리를 지나 성북동을 거쳐 수유동 국립 4.19민주묘지가 있는 마을까지 간다고 하자. 이 사람 저 사람을 골목 안, 집 앞까지 데려다주다 보면 마지막에 내릴 사람은 새벽 2~3시는 돼야 집에 돌아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람이 걸어 다닐 공간도 없는 도로를 닦는 것과 똑같은 발상을 가진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선거공약이 아닌가. 물론, 당연히, 이 후보는 떨어졌지만 그래도 어쩐 일인지 꼴지는 아니었다. 이런 나라가 ‘나쁜 나라’가 아니면 어떤 나라가 나쁜 나라인가.
요즈음은 사라져 버린 말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앞에 가는 도둑놈, 뒤에 가는 순사’라는 말이 있었다. 뜀뛰기 시합을 하면서 나란히 출발을 하지만 자신이 뒤처지면 앞에다 대고 소리치는 것이다. 앞에 가는 도둑놈, 뒤에 가는 순사! 앞에 가는 너는 도둑놈이고 뒤에 가는 나는 널 쫓는 경찰이라는 억지다. 자유로운 경쟁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이다. 이런 의식이 팽배한 나라가 또 ‘나쁜 나라’가 아니고 무엇인가.
지하철이 생겨난 이후 한동안 서울 시내의 모든 건널목을 지하로 집어넣은 때가 있었다. 지하철 계단을 이용해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사람들은 길을 건너야 했다. 차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리게 하자는 이 조치야말로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그래도 어쩐 일인지 한두 해 전부터 서울시내에서 건널목이 되살아나 요즈음은 당당히 땅 위로 길을 건넌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사람다운 삶을 생각하는 사람이 공무원을 하고 있구나! 얼마나 반가웠던가. 그래서 어른들이 그랬던 것일까. 망할 듯이 망할 듯이 그래도 망하지 않는 나라라고. 국수주의자가 되자는 게 아니다. 내 민족 내 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을 품고 그것을 아끼고 기리며 거기 묻혀서 기쁘게 살고 싶기에 하는 말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9호(2013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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