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UXMEN 칼럼]동그란 삼각형, 뜨거운 아이스크림
입력 : 2013.09.03 09:07:50
-
‘세금’ 하면 생각나는 이가 있다. 10년 전 국세청 요직인 조사국장과 국세심판원장을 역임한 최명해 씨다. 현장을 뛰던 시절의 무용담 한 토막. 당시 금 제련업체를 세무조사 하던 그는 우연히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무릎을 탁 쳤다. 굴뚝 안쪽 벽의 그을음을 긁어다 조사를 해보니 추측이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금 성분이 섞여 있었다. 여기서 나온 금이 장부에 제대로 기재돼 있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고는 세금을 추징했단다. 5년 치를 소급하고 가산세까지 합친다 해도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둔 세금이 나라 살림의 밑천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한동안 ‘세금’으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다. 이번엔 세금을 내는 사람들 얘기다. 왜 만만한 월급쟁이 유리지갑만 털어가려 하는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불만 폭발이다. 정부는 비과세 감면을 줄이면서 세목 신설이나 세율 인상이 아니기 때문에 증세는 아니라고 강변했다. 이에 앞서 대선 때는 ‘증세 없는 복지’ 공약으로 표를 얻고 이후에도 공약 준수를 다짐했다.
세금을 늘리지 않고 복지를 확대하겠다고? ‘동그란 삼각형’ ‘뜨거운 아이스크림’은 여태까지 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다. 스스로 신뢰에 흠집을 내는 궤변 시리즈다. 정부는 세법 개정안을 공표한 지 나흘 만에 급조된 수정안을 다시 내놓았지만 한번 깨진 신뢰를 주워 담아 되돌려놓기에는 이미 늦었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번 세법 개정안 파동은 일찌감치 그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여야 가리지 않고 ‘증세 없는 복지’를 앞다퉈 내놓을 때부터 알아봤다.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만든 당사자는 바로 정치인이다. 그러고서도 경제부총리를 몰아세우기 바쁘다. 몰염치다.
정치인 치부는 들출수록 역한 냄새가 진동한다. 국회의원 299명 중 세금을 한 푼도 안 낸 사람이 37명, 10만원 미만이 무려 51명에 이른다는 내용이 국회사무처 조사 자료에서 나왔다. 서로 정치 후원금을 내주고 소득공제 받기, 입법활동비와 특별활동비 등 비과세 몫 올리기와 같은 제도적 허점을 악용했다. 국회의원 연간 세비 1억4600만원을 일반인이 받는다면 최소 1500만원은 내야 한다. 지역구 쪽지 예산을 끼워 넣어 국민 세금을 쌈짓돈 정도로 생각하더니 정작 제 주머닛돈은 금쪽처럼 아까운 모양이다. 이 정도면 절세 수준을 넘어 탈세다. 국회 업무 중 가장 큰 몫이 바로 예산 감시지만 세금 한 푼 안내려고 각종 꼼수를 동원하는 정치인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복지=예산’은 상식이다. 문제는 복지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면서도 세금을 더 낼 생각은 없다는 데 있다. 불편한 진실은 또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세금을 덜 내고 있다는 점이다. 정도 차이일 뿐 부자, 중산층, 서민 모두에게 해당하는 얘기다. 경제활동인구 2500여만명 가운데 소득세를 내는 사람은 1150만명에 불과하다. 그 결과로 한국에서 세금과 건강보험 등 유사 세금을 합친 금액이 국민총생산 대비 25%로 OECD 평균(34%)에 비해 9% 포인트 낮다.
세금을 적게 내고 혜택도 조금 받는 우리의 ‘자력갱생’ ‘각자도생’ 방식은 후진국형 패턴이다. 그런 점에서 세금을 일종의 사회적 공동 보험이라고 보고 더 내도록 하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증세를 하면서 증세가 아니라고 우기고 거위 털을 뽑을 때는 몰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말썽이었다. 법인세율 조정은 경제 활성화와 충돌하고, 자영업자 증세는 경기 부진의 직격탄을 맞고 있어서 어렵고, 부가세 인상은 정권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 폭탄이라 건드리기 어렵고…. 세금 거두는 데 어디 만만한 곳이 있을 턱이 없다. 증세를 추진하다 정권이 무탈하지 못한 사례는 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국정 철학을 밝히고 좀 더 솔직하게 정면돌파를 했어야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누차 강조한 것처럼 지하경제의 검은 소득에 대한 구체적 징세방안을 내놓고, 또 한편으로는 정부가 앞장서 허리띠를 졸라매는 방안을 제시한 뒤 국민들에게 증세 필요성을 설득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재정 지출의 우선순위를 재조정하고 공약을 재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취지와 무관하게 우선 돈이 없어 내년부터 무상급식 예산을 삭감할 수밖에 없다는 경기도, 공무원 수당을 줄이고서도 재정파탄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천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온갖 따가운 시선에도 묵묵히 굴뚝을 오르는 세무공무원들이 흘리는 땀의 의미도 살아나지 않을까.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