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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XMEN 칼럼] 휴가의 경제학
입력 : 2013.08.09 16: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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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20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한미글로벌의 김종훈 회장은 평범하지 않다. 먼저 휴가. 책 100권을 싸들고 무려 40일 남짓 설악산에 칩거하며 온천에도 가고 독서로 머리를 식히며 푹 쉬는 식이다. 이어 15일간의 남부 아프리카 6개국 여행을 포함해 꼬박 두 달간 휴가를 보냈다. 2012년 초 얘기다.
김 회장은 2006년에도 설악산 기슭에서 비슷하게 은둔 휴가를 보냈다. 당시 이어진 해외여행지는 인도였다. 특이한 것은 임원은 5년마다, 직원은 10년마다 두 달간 안식 휴가를 등 떠밀어 보낸다는 점이다. 규정을 만들어 놓고 자신이 가장 먼저 ‘혜택’을 누렸다. 임직원들도 눈치 보지 말고 확실하게 재충전하라는 뜻이다.
김 회장의 범상치 않은 면모는 한참 열거해야 할 정도다.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해 재산의 사회환원을 실천하고 유서 쓰기를 통해 참삶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등 사회운동에도 열심이다. 사업 측면에서도 2세 승계 대신 후계 CEO를 사내에서 공개적으로 선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건설사업관리(CM·Construction Management) 업종을 개척한 선구자, ‘훌륭한 일터(GWP·Great Work Place)’ 만들기 운동 신봉자….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다방면의 용단은 깊은 사색과 여기서 비롯된 자신감 덕분일 성싶다.
긴 행렬이다. 비가 오락가락한 날씨에도 휴가를 떠나고 돌아오는 차량으로 고속도로가 붐빈다. 교통 정체는 당분간 더욱 심해질 것이다. 내용이야 제각각이겠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직장인들에게 휴가의 값어치를 어디다 비유할 수 있겠는가. ‘김종훈식 휴가’는 평범한 샐러리맨에겐 먼 나라 얘기지만 말이다.
최근 ‘일과 생활의 균형(WLB·Work Life Balance)’이 강조되는 것은 회사와 일을 우선 해오던 한국 직장인들에게는 커다란 변화다. 일과 생활 중 택일이 아니라 둘 다를 잘 해내는 것은 아직도 이상에 가깝다. 하지만 일부 대기업에서는 ‘일과 생활의 균형’이 급여 수준이나 고용안정성, 승진보다 더 중요한 가치라는 직장인 설문 결과가 벌써 10년 전부터 나오고 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자발적이든 억지로든 기업들도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대세를 따라갈 수밖에.
기업에겐 휴가와 유연근로시간제를 포함한 다양한 근무형태, 해당 직원과 가족을 대상으로 한 지원 프로그램이 WLB의 핵심이다. 가정을 일종의 사회제도로 보는 유럽에서 실업 억제와 출산·육아지원책으로 강조되기 시작한 이 같은 ‘균형’은 이제 인재 확보와 유지, 생산성 향상을 위해 필요성이 주목받고 있다. 한마디로 가정이 안정돼야 직장일도 잘하고, 잘 쉬어야 업무 효율성도 높아진다는 얘기다. 유례가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진행돼 한국 경제의 발목을 쥐고 있는 저출산 해소에도 일조하지 않을까 싶다.
일과 생활의 균형은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기업과 국가 모두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세상은 중후장대(重厚長大)에서 경박단소(輕薄短小)를 거쳐 창조사회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그동안 모방을 앞세운 추격자로서 몇몇 산업 분야에서 ‘최고(Optimus)’를 구가해온 한국 경제는 이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찾는 ‘최초(Primus)’가 우선적인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키워드인 창조경제는 개념을 놓고 논란이 여전하지만 결국 새로운 기술을 지렛대 삼아 신성장동력을 찾아내자는 것일 게다. 문제는 ‘무엇을’과 ‘어떻게’다. 창조경제의 선도역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출범한 미래창조과학부는 운동량 측정 키트를 장착한 운동화, 대걸레에 스팀 기능을 넣은 스팀청소기, 스크린 골프, 스마트폰 앱 형태의 설문조사 서비스 등을 창조경제 사례로 내놓았다. 대부분 ICT(정보통신기술)에 아이디어를 결합시킨 하이브리드 형태다. 이 정도 제품과 서비스 수준으로 ‘2017년 고용률 70%’ 달성이라는 창조경제 완결판이 나올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어떻게’에 대해 정부는 환경 조성으로 역할을 국한시키고 평등주의적 자원배분 대신 창조적 개인과 기업을 배려해야 한다. 정부가 신산업이나 신기술 육성에 직접 나서는 것은 3공화국 시절 얘기다. 민간의 자발적 창의와 혁신을 이끌어내는 게 우선이다.
가야 할 길이 멀다. 일-학습-놀이의 3박자는 이상적이지만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현하는 밑바탕이다. 이번 휴가가 창조경제를 위한 기초를 다지는 데 일조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이런저런 이유로 휴가를 못가는 분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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