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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슬픈 단어 아나키스트
입력 : 2013.03.07 15: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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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세르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조선인 아나키스트를 사랑하는 한 일본인 여인이 등장한다. 비운의 사랑인 셈이다. 언제 어떤 운명 앞에 놓일지 모르는 식민지 청년을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은 담담하고 처연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을 방문한 누군가가 침대 머리맡에 아나키스트 관련 책이 놓여 있는 걸 보고 그녀에게 “왜 그런 책을 읽냐?”고 물었다. 곧이어 나온 그녀의 대답은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상(思想)이니까요.”
한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슬픈 운명을 이해했고, 그 사람의 생각까지 사랑한 그녀는 충분히 멋졌다. 우리는 아나키스트(Anarchist)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번역한다. 난 그 번역이 일본의 한 대학생이 번역한 걸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오해는 바로 그 번역에서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무정부주의’라는 번역 때문에 나는 ‘아나키스트’하면 정부가 없는 혼란 상태를 먼저 떠올렸다. 아나키스트는 러사아어인 ‘트라보로 아나르키아 아나키스트’라는 말이 그 어원이다. ‘선장없는 배의 주인들’이란 말이다.
그러니 정확히 말해서 아나키스트는 ‘자유연합주의’ 정도로 번역되어야 한다. 인간해방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독재를 반대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와도 틀리다. 물론 이 이념은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었다. 아나키즘은 근대로 넘어오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 하는 중요한 정치사회적 경향이었다. 물론 한반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추앙하는 독립투사 단재 신채호 선생이 대표적인 조선의 아나키스트다. 아나키즘의 기본원리를 알려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진화론>을 읽어야 한다. 해설서인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하승우 지음, 그린비 펴냄)도 서점에 나와 있다. 아나키즘은 적자생존이나 생존경쟁이 아닌 상호협력과 연대가 인간사회를 이끌어온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이 독립운동에 가열 차게 뛰어들었던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제국주의 이론과 아나키즘이 대척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다윈의 적자생존 학설이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침략전쟁을 변호하는데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는 슬픈 단어다. 자신의 신념과 대의를 위해 유독 치열하게 투쟁했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 강점기에서 그 어떤 독립운동 세력보다도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광복된 다음에도 아나키스트의 불행은 멈추지 않았다.
권력에 의한 통치를 부정했던 아나키즘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부정하며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던 그들은 그렇게 망명지의 뒷골목에서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인간이 한 번 품었던 사상은 결코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는 법.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진화론>
[허연 매일경제 문화부 부장대우·시인·문학박사]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0호(2013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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