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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⑥ 물쑥도 있고 개불알꽃도 있다
입력 : 2013.02.01 11: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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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붙이고 싶기는 ‘부평초’가 서커스 단원들의 유랑하는 삶을 드러내주기에 좋은데 이 말이 흘러간 가요에 주로 등장하는 단어라 너무 낡은 느낌이어서 내가 싫었다. 그래서 그 이름이 순우리말로 무언가 하고 사전을 찾아보니 ‘개구리밥’이 아닌가.(하이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써서 쓴 작품에 ‘개구리밥’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게다가 서점에 와서 ‘개구리밥 하나 주세요’ 할 독자를 상상하는 건 끔찍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이 부평초에서 평이라는 글자 하나를 떼어내고 부초로 하자는 것이었다. 한자로 써놓고 보니 의미도 와 닿았다. 그런 사연을 안고 <부초>라는 책은 비로소 이름을 얻게 된다. ‘부초’는 그렇게 내가 만든 조어(造語)였다. 물에 떠서 개구리랑 함께 자라는 풀이라 개구리밥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몰라도, 그때 그 풀 이름이 좀 아취 있고 정겨운 이름이었다면 부초라는 단어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면 우리 풀 이름이 야속하기도 하다. 서민의 삶과 애환이 담겨 있는 것이 우리의 풀 이름이다. 거기에는 눈물도 기쁨도 누군가에 눈을 흘기는 놀부 심보까지 담겨 있다. 하찮은 풀에는 하찮은 이름을 붙여 버리면서 킬킬거렸을 그때 그 사람들이 떠오른다. 까마귀오줌통, 애기똥풀, 개구리발톱… 껄껄하게 거칠다고 해서 껄껄이풀이 있는가 하면 도둑놈 갈고리라는 풀도 있고 부처손도 있다. 꽃모양이 나팔 같다고 그냥 나팔꽃이 되었고, 물가에서 핀다고 해서 물쑥이라고 이름 붙은 구박덩어리 풀도 있다.
그 가운데서도 그 이름이 고약하기로는 단연 ‘소경불알’과 ‘개불알꽃’이 아닌가 싶다. 소경불알은 더덕같이 생긴 풀인데 더덕인 줄 알고 캐보면 더덕은 없고 동그란 덩어리 한 개가 달랑 달려 있는 풀이다. 얄밉고 어이없어서 아예 소경이라는 이름까지 붙였겠지만 요즈음이라면 장애인 비하로 큰일 날 이름이다.
자주색 꽃이 동그랗게 한 송이씩 늘어져서 피는 개불알꽃은 정말 웃음이 나올 정도로 꽃 모양이 개의 그것처럼 생기기는 했다. 그러니 이름을 그렇게 붙인 사람을 탓하기 보다는 그 꽃모양의 업보라고 해야 할 꽃이 개불알꽃이다. 그런데 어쩌랴. 이 동그란 꽃이 그 흉악한 이름과 달리 앙증맞아서인가.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 개불알꽃의 화분이 시중에서 몇 만원이라는 고가로 팔리고 그것 또한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야생화로 피어나는 이 꽃을 닥치는 대로 캐가는 바람에 현재는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옛 선조들의 이름 붙이기에는 꾸밈이 없다. 있는 그대로, 직설적이다. 거기에 농경시대와 신분제도의 차별과 불합리를 살아낸 민초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 보인다.
소쩍새는 소쩍소쩍하고 운다. 개골개골하고 운다고 개구리라고 이름 지은 무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저 그렇게 듣고 넘길 새 이름이지만 그러나 여기에는 전설 아닌 전설이 붙어 있다. 소쩍소쩍하는 울음소리는 솥이 작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층층시하 가난한 살림에 어른들 밥을 푸고 아이들 밥을 푸고 나면 솥이 작아서 자기 먹을 게 없다 보니 굶어 죽었다는 며느리의 한이 맺힌 울음소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소쩍새인 것이다. 죽어서도 차마 잊지 못하고 이 산 저 산을 오가며 ‘솥이 적어, 솥이 적어’하며 우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며느리의 한이 저렇구나 싶게 애간장을 녹인다.
남한강가의 산비탈에 세워진 내 작업실에도 5월의 밤이면 소쩍새가 찾아와서 운다. 어쩌다가 잠이 깨어 그 깊은 한밤에 이 새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할 때가 있다. 첫해에는 ‘참… 애간장을 녹인다는 말이 이런 것이로구나’하며 그 새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해가 가면서 이제는 봄밤이 되면 이 새소리를 기다리게 되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잘 먹었을 때 ‘배가 터지게 먹었다’고 한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배가 터지게 먹겠는가. 게다가 손님상을 잘 차린 집을 다녀오면서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렸다’고 한다. 과장이 심해도 너무하다 싶지만 이것 또한 해학과 과장이 넘치는 우리들의 심성이 스며든 언어습관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좀 극단적인 비유이기는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심성을 대변하는 두 나라의 교통안전 표어가 있다. 하나는 동해바다로 가는 미시령의 굽이굽이에 써붙였던 ‘달리면 죽는다!’라는 표어이고 다른 하나는 도쿄에 나붙었던 ‘좁은 일본, 그렇게 서둘러 어디로 가시나요?’라는 표어다. 두 나라의 민족성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어가 또 있을까. 한국도 그렇지, 달리면 죽는다니. 차는 달려야 하는 것인데 달리면 죽는다니 그렇다면 미시령을 넘을 때는 차를 밀고 가기라도 하라는 소리인가. 일본 또한 그렇다. 좁은 일본이라니, 일본이 왜 좁은가. 한반도보다도 그 면적이 큰 나라이면서 서둘러 갈 곳도 없이 좁은 나라라니. 상징적 의미라고는 해도 이것 또한 위선이 아닌가.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을 말하는 ‘생얼’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붙여준 사물의 이름은 그렇게 생얼을 하고 있다. 어슴푸레한 의미로 덕지덕지 화장을 한 얼굴 같은 이름을 붙이는 일은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닌 것이다.
개불알꽃이면 어떻고 물쑥이면 어떠랴. 더 확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니 차라리 더 좋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이게 한국인인 것을!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9호(2013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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