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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현대미술 오감을 말하다
입력 : 2012.12.07 15:5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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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우리는 그냥 손쉽게 전위적인 미술은 언제나 대중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라 넘겨짚는다. 하지만 미술가는 작품을 통해 소통한다. 아니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닫아버린 소통의 채널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미술이 ‘보는 것’이라는 명제는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현대미술의 공간은 소리와 감촉, 냄새와 맛으로 채워지고, 이는 미술은 보는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을 반박한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미술은 시각 이외의 다양한 감각을 통해 관람자와의 소통을 시도해왔다.
오감에 따라 바라보기, 들어보기, 만져보기, 맡아보기와 맛보기가 미술의 창작과 감상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오감을 자극하고 오감으로 느끼는 작품들이 ‘우리 시대의 미술’이 된 것이다.
물론 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추상미술이 등장하던 20세기 초반부터 음악은 미술이 추구했던 순수한 감흥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담당해 온 롤모델이었다. 칸딘스키나 몬드리안 같은 화가들은 음악을 들으며 작업하거나 음악가들과의 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전위미술의 시조 격인 마르셀 뒤샹은 ‘주파수 회화’를 구상하며, 우리가 잘 훈련하면 회화와 조각을 ‘들을 수’있는 경지에 이를 것이라 주장했다.
비단 듣기 좋은 음악 뿐 아니라 소음도 미술에 등장했다. 우리에겐 백남준의 멘토로 유명한 작곡가 존 케이지는 ‘4분 33초’라는 작품에서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가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4분 33초 동안 공연장에 발생한 갖가지 웅성거림, 기침소리, 의자 들썩이는 소리 등으로 우연에 의한 음악을 추구했다.
이런 케이지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미술가들은 1960년대 플럭서스 운동을 통해 피아노 현에 톱질을 하거나 바이올린을 때려 부수고, 사다리에 올라가 밑에 있는 양동이에 물을 부어 만드는 퍼포먼스로 화답했다. 로리 앤더슨처럼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음반을 발매하고 공연을 통해 작업하는 미술가도 있고, 크리스천 마클레이처럼 오래된 레코드판을 전시장 바닥에 깔아놓고 관람객들이 이를 밟게 해서 흠집이 난 레코드를 재생해 세상에 하나뿐인 사운드를 만드는 이도 있다. ‘사운드 아트’라고 하는 분야가 각종 비엔날레나 주요 미술관의 전시에 편입된 지도 이미 10년이 훌쩍 지났다.
이불의 ‘화엄’
덕분에 후배 예술가들은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혹은 이하)’의 것을 자유롭게 미술의 재료로 쓸 수 있게 되었다.
먹거리 또한 빠지지 않는다. 톰 마리오니는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는 행위는 최고의 미술이다’를 통해 금요일 저녁의 유쾌한 모임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지금은 콜럼비아 대학의 교수로 있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는 전시장에 부엌을 만들고 팟타이나 카레를 만들어 대접하는 것을 작품으로 삼는다. 음식은 공짜로 제공되고 관객들은 느긋하게 음식을 즐기며 처음 보는 다른 관람자들과 섞여 담소한다.
여기에 작품의 관람 포인트는 바로 사람들 간의 대화와 소통·미술작품은 관람자 한 사람을 겨냥한 감상의 대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이런 작품이 ‘소통’이라는 우리 시대의 화두는 물론 미술사의 선례들과 동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 없다. 결국 가장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겼던 동시대 작품이야말로 실제로는 나와 우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제 갤러리나 미술관에서 우리 시대의 미술 작품을 마주하며 난감했던 사람은 더 이상 주눅 들거나 답답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시대의 미술 키워드는 작가가 아니라 관람자이고, 이미 관람자인 당신은 작품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셈이니까.
왜 이런 것이 미술작품인지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배운다면 이제 남은 것은 즐기는 것뿐이다. 적극적으로 즐기는 미술 경험이야말로 우리 시대 미술이 원했던 바로 그 소통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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