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④ Time and Art

    입력 : 2012.06.01 17: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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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아마도 자신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유일한 동물일 것이다. 인간은 유한함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의 흔적이 사후에도 기억되길 바라면서 ‘문명(文明)’을 이루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시간과 공간은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과거를 회상해보자. 우리의 과거가 아무리 화려하고 멋지다 할지라도 혹은 아무리 불행하다 할지라도 지금 생각해 보면 찰나(刹那)이다. 우리가 수십 년 후, 오늘 이 순간을 기억한다 할지라도 그 기간은 여전히 찰나일 것이다. 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기원전 11세기 고대 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솔로몬 왕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면서 최고의 삶에 대한 단상을 남겼다. 그것이 구약성서에 실려 있는 <전도서>다. 전도서의 원래 이름은 코헬렛(Qoheleth)으로 ‘외치는 자’라는 의미다. 솔로몬 왕은 이 전도사를 통해 우리에게 최선(最善)의 삶이 무엇인지 갈급하게 외친다. 전도서 3장 1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모든 일에는 다 그것을 행해야 할 알맞은 때(zeman)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우주의 순환에 적당한 때(eth)가 있다.” 솔로몬은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고대 히브리어 ‘제만’과 ‘에트’가 그것이다. 이 두 단어는 유사하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다르다. ‘제만’은 개인의 삶에서 어떤 일을 시도하고 달성해야 할 시간을 의미하고, ‘에트’는 사계절의 흐름과 같이 우주와 자연의 순환주기의 시간을 의미한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일상적이며 수량적인’ 의미를 지닌 시간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만’과 ‘에트’ 모두 신이 인간을 위해 준비한 시간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시간이란 신이 마련한 우주와 시대의 흐름을 적은 달력이다. 고대 히브리인들과는 달리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로 구분했다. 영화 <트로이>에서 영웅 아킬레스는 트로이 출정을 망설였다. 그는 어머니인 테티스를 찾아 조언을 구한다. 그녀는 아킬레스에게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날이 올 것이란 걸 알았다고 말한다. 테티스는 만일 아킬레스가 트로이로 가지 않는다면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긴 하겠지만 그가 죽은 후 ‘아킬레스’라는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그가 트로이로 간다면 그는 전쟁을 통해 영광을 얻고 후대인들은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길 바라는 아킬레스는 전쟁에 나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흐르는 시간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역사로 만들기 위해 참전한다. 아킬레스에게 이 결정적인 순간은 다른 보통 시간과는 다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상적인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신이 이미 예정한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했다.

    어떻게 하면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바꿀 수 있을까? 필자는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네이틱(Natick)’이란 도시에서 목회한 경험이 있다. 백인 할머니만 60명 정도 모인 전형적인 미국교회에 취임하면서 교적부를 보니 1898년생 할머니가 계셨다. 이름은 에벌린 젠넬. 나이는 95세. 에벌린은 수요일이면 동네 할머니를 모아 포커를 치고, 핑크색 정장을 즐겨 입는 멋쟁이 할머니였다. 그 당시 필자는 미국대학에서 과목을 맡아 학부와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목요일이면 에벌린과 함께 양로원에서 요양 중인 교인들을 심방하곤 했다. 심방이라야 자식들도 잘 찾아오지 않는 노인들의 쌓인 이야기를 2~3시간 동안 듣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루에 3명 정도, 6~9시간 동안 이들 삶의 이야기를 들은 게 내가 받은 최고의 교육이었다. 유난히 눈이 많이 오는 매세추세츠 주 1월, 한밤중에 네이틱 시립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에벌린이 응급실에서 날 찾는다는 전화였다. 병원으로 가니 가족들이 많이 와있었다. 거의 100년 동안 사용한 심장이 멈출 때가 된 것이다. 에벌린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심장박동기를 넣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에벌린은 가족을 다 내보낸 후, 나에게 난처한 부탁을 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신의 은총으로 건강하게 살았고 직계가족만으로도 3번 결혼을 통해 100명 가까이 된다며, 수술을 받지 않을 예정이니 이대로 하늘나라에 갈수 있도록 가족을 설득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에벌린에게 무엇을 조언할 수 있을까? 나는 다음날 에벌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에벌린, 당신의 삶은 양로원에서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삶을 당신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 후 에벌린은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 필자가 그 교회를 떠난 후에도 100세까지 심방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나는 이런 에벌린의 결정과 삶을 ‘예술’이라 부르고 싶다.

    일상적인 순간이 특별한 순간, 신이 개입하는 순간으로 만드는 솜씨를 ‘예술’이라고 한다. ‘예술’을 뜻하는 영어단어 ‘Art’는 아주 오래된 유럽어 어근 ‘르타(*rta-)’에서 유래했다. 서양문헌 중 가장 오래된 문헌 중에 하나인 힌두교의 베다(Veda)에 등장하는 르타는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의 작동을 지배하고 조절하는 자연 질서의 원칙’이다. 르타는 자연과 사회의 도덕, 그리고 의례가 바르게 작동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의례, 예배’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ritual(라틴어 ritus)’는 ‘일정한 생각, 말, 행동을 통해 우주의 원칙을 회복하는 시도’이다.

    르타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의 명령들을 ‘다르마(Dharma)’라고 하며, 개인에 주어진 명령을 ‘카르마(Karma)’라고 한다. ‘아트’란 시공간에 갇혀있는 유한한 인간에게 그것을 초월해 자신에게 주어진 최선(最善)을 선택하고 추구해 ‘영원’을 만들려는 솜씨이다. 이것을 추구하는 자를 ‘아티스트’라고 한다. 아티스트는 자신의 삶의 최선을 알려고 노력하고, 보통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서슴지 않고 행하기에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가 그런 삶을 살도록 유도하고 전염시킨다.

    기원전 4세기, 서양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Vita brevis, ars longa,

    occasio praeceps experimentum periculosum,

    iudicium difficile.”

    이 라틴어의 문장을 번역하면,

    “인생을 짧고 예술은 길다.

    기회는 금방 사라지고 경험은 위험이며,

    판단은 어렵다.”

    우리가 걸어온 지난날을 잠시 생각해보자. 히포크라테스의 말대로 그것은 순간이었다. 우리는 순간을 영원으로 멋있게 만든 예술가들을 성인(聖人)이라고 부른다. 성인들은 모두 우주의 소리를 ‘귀(耳)’로 듣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주위사람들에게 ‘입(口)’으로 전하고, 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긴(壬)’ 사람들이다. 오늘 나만의 시간을 내서 우주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겠다.

    서울대 배철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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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오리엔트언어들에 매료되어 하버드대 고대근동학과에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서아시아언어문명 주임교수이다. 주요 관심사는 고대오리엔트문명인 후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간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일이다. 주요저서로는 <타르굼옹켈로스 창세기> <타르굼아람어문법> <창세기, 샤갈이 그림으로 그리다> 등이 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1호(2012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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