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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한국의 고택] 강릉 오죽헌 | 조선시대 선비들의 성지에서 가을을 만끽
입력 : 2025.11.10 16: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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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 몽룡실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이다. 퇴계와 율곡은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한 두 거봉으로 이들의 학문적인 성과는 학맥으로 이어지면서 조선 성리학의 중심축을 이루었다. 따라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관련된 유적지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반드시 순례해야 할 성지가 되었다. 퇴계 이황의 유적지가 안동의 ‘도산서원’이라면 율곡 이이와 관련된 유적지는 강릉의 ‘오죽헌’이었다.
까마귀처럼 검은 오죽(烏竹)오죽헌은 강릉최씨 최응현에 의해 건립되었다. 최응현(1428~1507년)은 조선 전기 대사헌, 병조참판을 역임한 인물로 즈므마을에서 북평촌으로 이거하면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최응현은 이 집을 둘째 사위인 용인이씨 이사온에게 상속하였다. 그리고 이사온은 무남독녀 외동딸의 사위 평산신씨 신명화에게 상속하였다. 신명화는 신사임당의 아버지로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두었다. 오죽헌을 넷째 사위인 안동권씨 권화의 아들 권처균에게 상속하였다. 신명화의 부인 용인이씨는 외손인 이이에게수진방에 집을 사주고, 권처균(權處均)에게는 외손봉사(外孫奉祀·직계 비속이 없어 외손이 대신 모시는 제사)를 조건으로 오죽헌이 속해 있는 고택을 상속하였다. 이후 오죽헌은 강릉에 살고 있던 안동권씨 죽헌공파 종택이 되었으며, 안동권씨는 대대로 외손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오죽헌(烏竹軒)이라는 당호는 권처균이 지은 것이다. 오죽헌을 창건할 당시부터 집 주위에는 줄기가 까마귀처럼 검은 오죽(烏竹)이 심어져 있었다. 외할머니 용인이씨로부터 집을 상속받은 권처균은 자신의 호(號)와 집의 당호(堂號)를 오죽헌(烏竹軒)이라 하고 일원을 정비하여 종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율곡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오죽헌은 안동권씨 죽헌공파 후손들에 의해 온전하게 보존되었으며, 특히 권처균의 4대손인 권윤재(權允載)는 오죽헌을 옛 모습 그대로 보수하였다. 현재도 오죽헌의 섬돌 주위에는 줄기가 까마귀처럼 검은 오죽(烏竹)이 시들지 않고 더욱 번성하여 옛날의 운치와 명성을 그대로 후세에 전하고 있다.
율곡 이이가 나고 자란 곳
오죽헌은 율곡 이이가 탄생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율곡이 태어난 조선 전기에는 여자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처가로 장가를 가는 서류귀가혼(壻留歸家婚)의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서울로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이원수가 강릉 오죽헌으로 장가를 와서 살았다. 율곡이 태어난 방은 몽룡실이다. 율곡은 신사임당이 용꿈을 꾼 후 세상에 태어났다. 태몽에 동해 바다의 신녀(神女)가 사내아이를 안고 와서 신사임당 앞에 데려다 놓았는데, 피부는 옥처럼 깨끗하고 신령스러운 빛이 났다. 그리고 출산 전날의 꿈에 흑룡이 큰 바다에서 날아와 안방에 들어와 앉는 꿈을 꾸었다. 마침내 율곡이 태어나자 아명을 용이 나타났다는 의미의 현룡(現龍)이라 하고,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였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민간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집이다. 오죽헌은 좁은 의미로 별당 건물 한 채를 의미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별당을 포함한 본가로 사랑채, 안채, 곳간채, 문간채, 어제각, 문성사, 율곡 기념관을 포함한다.
오죽헌 문성사
오죽헌 안채
오죽헌 안채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별당인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4칸 크기 신사임당 영정 율곡 영정 의 대청과 1칸 반 크기의 온돌방, 그리고 반 칸 너비의 툇마루로 된 단순한 一자형 평면 건물이다. 북쪽의 온돌방은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이다. 온돌의 뒤쪽 반 칸은 별도로 마루를 드렸는데, 당시 다른 사대부들의 별당과 마찬가지로 책을 보관하던 서실(書室)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오죽헌 남쪽의 대청마루는 율곡이 6세까지 공부하던 곳이다. 4면은 굵직한 댓돌로 한 기단을 두고 그 위에 자연석으로 초석(礎石)을 배열하고 네모기둥을 세웠다. 집은 5량 가로 구성되고 기둥 위에 주두(柱頭·기둥의 가장 윗부분)를 놓고 익공(翼工· 기둥 상부에서 창방과 직교해 보를 받치는 짧은 부재)으로 처리한 이익공양식(二翼工樣式)의 집이다. 도리(들보)는 굴도리(서까래의 하중을 받는 도리가 둥근 형태)이고 그를 운두(둘레나 높이의 우리말)가 낮은 장여(전통 목조 건축에서 도리 밑을 받치는 길고 모진 나무 부재)로 받치며, 다시 그것을 주간(柱間·기둥과 기둥사이)에서는 창방 위에 화반(花盤·공포대의 주간을 구성하는 부재)으로, 기둥에서는 첨차 위에 소로(小累·두공, 첨차, 한대, 제공, 장여, 화반 등을 받치는 네모진 나무)를 놓아 받치고 있다. 오죽헌은 공포 양식의 수법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익공(翼工)집이며, 주심포집에서 익공식 집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이처럼 오죽헌은 율곡의 탄생지라는 역사성과 함께 우리나라 건축사의 전환점이 되는 문화적 중요성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김경수, 오죽헌 1902년 정화 사업 거치며 후손 이주안동권씨 죽헌공파 종택으로써 오죽헌의 본래의 모습은 본가 우측 대나무 숲의 가운데에 가묘가 있고 그 앞으로 오죽헌이 있는 것이다. 현재 문성사가 있는 자리는 어제각이 있던 자리이다. 그 뒤는 소나무 숲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본가는 ㅁ자형의 평면이었고 우측에 입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당의 뒤쪽으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정면에 위치한 사랑채는 ‘호해정사(湖海精舍)’라 이름하였고, 5대 권진영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사랑채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명나라 명유인 진계유의 ‘암서유사(巖棲幽事)’ 에 나오는 시구를 추사 김정희의 필적으로 판각한 것이다.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오죽헌에 살고 있던 안동권씨 후손들은 이주하였다. 1974년 이곳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종가는 오죽헌 입구 2층 양옥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때 오죽헌 동쪽에 있던 안동권씨 소종가인 청풍당도 함께 오죽헌 앞 2층 벽돌집으로 이주를 하였다. 어제각을 헐어내고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文成祠)를 신축하고 본가의 안채와 곳간채를 헐어내고 율곡 기념관 등을 개축하였다. 그리고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던 소종가 청풍당을 헐어내고 정원을 만들었다. 다만 어제각은 1987년 고택의 서쪽에 복원되었으며, 안채와 곳간채는 다시 1996년에 복원되었다. 오죽헌은 정화 사업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이 되었지만 앞뜰에 있는 매화나무, 배롱나무, 소나무, 오죽이 고택을 파수꾼처럼 지키고 있다. 매화나무는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봄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혹독한 추위와 흰 눈을 뚫고 피어난 붉은 빛깔의 매화는 고매한 선비의 모습이다. 여름에는 오죽헌보다 나이가 많은 600년 수령의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피운다. 그리고 오죽과 소나무는 사계절 푸르른 군자(君子)의 모습으로 오죽헌을 둘러싸고 있다. 한편 어제각에는 율곡 선생이 사용하였던 벼루가 역사가 되어 고택을 지키고 있다. 정조는 이 벼루를 보고 감격하여 직접 짓고 쓴 어제어필(御製御筆)을 벼루 뒷면에 새겼다.
율곡의 벼루 뒷면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내어 涵 婺池 공자의 도를 본받아 象 孔石 널리 베풀고 普 厥施 용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 龍歸洞 구름은 먹을 뿌려 雲 潑墨 학문은 여기에 남았도다. 文在玆 차장섭 강원대학교 교양학부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조선사연구회 회장, 강원대 도서관장, 기획실장, 강원전통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로 한국사, 미술사 등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