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성원의 주얼리 인사이트] 잊혀가는 천연 진주의 성지, 바레인

    입력 : 2025.03.26 17:17:01

  • 지난해 2월, 카타르의 ‘도하 주얼리&워치 전시회’를 방문했을 때 느꼈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에서 거의 자취를 감췄다던 천연 진주가 놀랍게도 한자리에 모여 희귀한 존재감으로 관람객들을 매혹시키고 있었다. 진주의 역사적 원산지인 페르시아만이라는 장소성을 살려 중앙 통로에서는 전통 방식으로 진주 장신구를 제작하는 시연이 펼쳐졌고, 티파니를 비롯한 몇몇 전시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천연 진주 컬렉션을 선보였다.

    고요한 바다가 세월을 거쳐 빚어낸 은은한 광채가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모습을 목격했다. 천연 진주의 희소성은 고대부터 전설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연회에서 승부를 걸며 귀에서 빼낸 값비싼 진주를 식초에 녹여 마셨다고 한다. 이 진주는 당시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 로마 시민 1000가구가 1년 동안 살 수 있는 금액에 해당했다. 진위 여부를 떠나 이 과감한 일화는 수세기 동안 진주가 가진 신비로운 매력과 가치를 대변해 왔다. 하지만 그 전설 속 보물과 같은 천연 진주는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사진 FD갤러리(뉴욕)
    사진 FD갤러리(뉴욕)

    우리가 알고 있는 진주, 그 기원은 다르다

    오늘날 주얼리 매장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진주는 사람의 손길로 키워낸 것이다. 20세기 초 일본의 미키모토 고키치가 양식 진주 기술을 상업화하면서 1920년대에 보다 일관된 크기와 색상의 진주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시장의 지형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반면 천연 진주는 전적으로 자연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다. 조개 안으로 우연히 들어간 작은 모래알이나 기생충을 감싸는 과정이 수년에 걸쳐 반복되면서 탄생하는데, 1만분의 1이라는 희박한 확률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처럼 긴 생성 과정과 예측 불가능한 자연의 섭리 속에서 천연 진주는 각기 다른 색과 광택을 가지며 독특한 개성을 발산한다. 한편, 양식 진주는 조개에 인위적으로 핵을 삽입해 진주층이 형성되게 유도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덕분에 크기와 형태가 일정한 진주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어 이전에는 소수 특권층만 누릴 수 있었던 진주의 고귀한 아름다움이 대중에게도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천연 진주는 자연이 빚어낸 희소성과 독특함으로, 양식 진주는 접근성과 균일한 품질로 각각 진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천연 진주의 마지막 보루, 바레인

    페르시아만의 작은 섬나라 바레인은 천연 진주의 전통을 지키는 몇 안 되는 예외적인 곳으로 남아있다. 양식 진주가 세계 시장을 지배한 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바레인은 법적으로 양식 진주 생산을 금지하고 오직 전통적인 방식으로 바다에서 수확한 진주만을 인정하는 강력한 보호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바레인 주변 해역은 천연 진주 성장에 최적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민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독특한 염분 균형을 이루는 현상이 발생한다. 미묘한 수질의 변화가 조개 내부에서 형성되는 진주층의 질감과 광택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품질의 진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19세기까지 바레인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천연 진주 생산지였다. 석유가 발견되기 전까지 바레인의 경제는 진주 산업에 의해 움직였고, 사람들의 삶과 문화 그 자체였다. 항구에는 수천 척의 배가 모여들었고 잠수부들은 나무로 만든 코마개를 착용한 채 바다로 뛰어들어 조개를 찾았다.

    오늘날 바레인에서는 과거의 대규모 산업과는 달리 극히 제한적인 양의 천연 진주만 얻을 수 있다. 소수의 전통적인 잠수부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방식을 고수하며 해마다 소량의 천연 진주를 채취한다. 이들은 산소통 없이 수심 10~20m까지 잠수하며 손으로 직접 조개를 건져 올린다. 사실상 경제적 이유보다는 바레인의 문화적·역사적 유산을 보존하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 바레인은 천연 진주의 명성과 신뢰도를 유지하기 위해 엄격한 품질 기준과 감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학적 검증을 통해 천연 진주를 감별하고, 그 진위를 보증하는 공식 문서를 발행한다. 이러한 인증은 극소량만 시장에 나오는 바레인산 천연 진주가 주로 경매나 특정 보석상을 통해 컬렉터 시장에서 거래될 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쇼메의 천연진주
    쇼메의 천연진주

    진주는 시간과 기술이 쌓여야 완성된다

    천연 진주로 한 줄의 목걸이를 완성하려면 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크기와 색, 광택이 조화를 이루는 진주들을 모으는 데만 수년, 때로는 수십 년도 소요된다. 이 섬세한 작업에는 비슷한 크기와 색감을 가진 진주를 선별해 하나의 연결된 스토리로 만드는 장인의 안목과 기술이 필수적이다. 환경적 측면에서도 천연 진주는 다른 보석과는 차별화된 가치를 지닌다. 대부분의 보석이 광산 개발과 정제 과정을 필요로 하는 반면, 진주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진주 채취는 바다 생태계에 최소한의 영향만을 주고 복잡한 가공 없이도 아름다움을 온전히 보존한다. 이처럼 바다의 생태계를 존중하는 지속 가능한 방식은 현대 럭셔리 산업에서 더욱 빛나는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희소성이 높은 보석이 투자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품질의 대형 다이아몬드나 열처리 되지 않은 루비와 사파이어처럼 천연 진주도 럭셔리 컬렉터들에게 중요한 투자 자산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바레인산 천연 진주는 공급이 제한적이고 시장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가치가 꾸준히 상승하는 추세다.

    오래 남을 가치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보석

    럭셔리 시장에서 진정한 희소성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균일하게 가공된 보석과 달리 천연 진주는 각각의 개성이 살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매력이 깊어진다. 천연 진주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보석이기도 하다. 고대 왕족들이 애지중지하던 진주, 유럽 왕실이 계승해 온 유산을 오늘날에도 감상하고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언젠가 박물관에서 천연 진주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 한 알이 품고 있는 바다의 시간을 떠올려 보자. 다이아몬드나 컬러 스톤이 화려한 빛과 색을 발하는 순간에도 진주는 은은한 광채로 긴 시간의 흐름을 간직해 왔다. 그것이 천연 진주가 품고 있는 본질적 아름다움이다.

    윤성원 주얼리 칼럼니스트·한양대 보석학과 겸임교수

    주얼리의 역사, 보석학적 정보, 트렌드, 경매투자, 디자인, 마케팅 등 모든 분야를 다루는 주얼리 스페셜리스트이자 한양대 공학대학원 보석학과 겸임교수다. 저서로 <젬스톤 매혹의 컬러> <세계를 매혹한 돌> <세계를 움직인 돌> <보석, 세상을 유혹하다> <나만의 주얼리 쇼핑법> <잇 주얼리>가 있다.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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