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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은 기자의 미식미담(美食美談)] 에빗 | 전국 각지 ‘한국의 맛’을 파인다이닝으로
입력 : 2025.01.17 18: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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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식은 그 자체로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각 재료가 가진 특성과 조리법은 오랜 전통을 통해 이어져 왔고, 그 안에는 세밀한 배려와 철학이 녹아 있습니다.” 지난 가을, 뜨거운 화제를 모은 넷플릭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서 조셉 리저우드 에빗(EVETT) 오너셰프는 시종일관 한국 식재료와 한식 조리법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미국 ‘프렌치 런드리’, 영국 ‘레드버리’ 등 세계적인 양식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호주 출신 외국인 셰프지만, 지금은 서울에서 누구보다도 ‘한국적인’ 파인다이닝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하며 그 경계를 넓혀가고 있다.
에빗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현지 음식과 문화를 바탕으로 팝업 레스토랑을 진행하던 리저우드 셰프가 한식 문화에 매료돼 2019년 문을 연 레스토랑이다. 한국의 식재료와 토속 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다이닝 메뉴를 선보인다. 그는 “지난 2016년 서울에서 팝업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동안 광장시장을 비롯한 활기찬 현지 시장에서 만난 다양한 제철 식재료와 갖가지 반찬에 놀랐다”며 “특히 김치, 고추장 같은 전통 식품의 깊이와 복합적인 발효 기법, 한국 사람들의 장인 정신이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에빗은 한국인들에게조차 잊혀 가는 ‘한국의 맛’을 식탁에 올린다. 예컨대 최근에는 제주도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들과 함께 직접 바다 밑에 들어가 성게를 채집하고, 해녀들의 전통과 제주 바다의 신선함이 담긴 메뉴 ‘해녀’를 선보였다. 덕분에 손님들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그 음식에 깃든 식문화까지 경험할 수 있다.
이야기가 꽃 피우는 다이닝조셉 리저우드 셰프가 이끄는 에빗 팀은 제주, 담양, 영동, 곡성 등 전국 각지를 탐방하면서 현지에서 나는 다양한 식재료와 각 지역의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 한식 조리기법을 체험한다. 이를 통해 좋은 식재료를 직접 선별하는 것은 물론, 한식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새로운 메뉴에 대한 영감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에빗의 모든 메뉴에는 에빗 팀이 몸소 경험한 한식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식재료 연구는 우리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생산지 방문은 계절의 변화와 전통적인 재배 방법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런 여정은 단순한 식재료 수급이 아니라, 전통을 유지하는 농부와 장인들과의 관계를 쌓아가는 과정입니다. 각 지역은 고유의 특산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주도의 해산물, 담양의 대나무 제품, 영동의 포도 품종, 곡성의 전통 농산물이 그러합니다.”
이 같은 경험을 토대로 한 에빗의 새로운 식재료 발견은 메뉴에 점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선 테스트 키친에서 광범위한 ‘실험’을 통해 해당 식재료가 다양한 조리법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파악한 뒤 차근차근 메뉴 개발로 이어진다. 리저우드 셰프는 “어떤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요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식재료의 가치를 온전히 반영하면서 우리의 기준을 충족하는 요리를 개발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에빗의 메뉴는 계절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특정 시그니처 요리는 계절 재료에 맞게 조금씩 변주된다. 한국 전통 달력의 24절기를 바탕으로 메뉴 개발을 진행한다는 설명이다. 에빗은 점심과 저녁 한 가지 코스로 운영된다. 계절마다 가장 인상 깊은 재료들로 완성한, 특별한 여정이다. 가볍게 에빗의 메뉴들을 테이스팅할 수 있는 런치 코스는 현재 8~9개 메뉴를 제공한다. 2024년 12월 기준 나무, 제주, 불, 야생, 갓, 오리 또는 한우, 숲, 마지막 한 입순으로 코스가 진행된다. 메뉴명은 음식에 담긴 이야기를 가장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주는 단어를 꼽았다.
에빗 관계자는 “평소 채집을 즐기는 셰프님이 직접 곳곳에서 수집한 재료들이 음식의 요소로 등장한다”며 “대표적인 것이 리프레시 메뉴인 ‘야생’에 올라가는 야생 개미다. 산에서 직접 채집해온 개미를 깨끗이 씻어 디저트의 산미를 끌어올리는 요소로 소르베에 곁들인다”고 설명했다.
에빗의 시그니처 메뉴에는 제주 ‘용암수’로 지은 토종 쌀밥과 계절 반찬을 곁들인 요리와 전통 발효 기법을 활용해 숙성한 한우 스테이크와 산에서 자란 야생 허브, 전통 보존법과 현대 조리 기법을 결합한 제철 생선 요리 등이 꼽힌다. 이들 메뉴에는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제주’는 최근 식재료 연구를 위해 제주를 찾은 에빗 팀이 제주식 물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메뉴다. 잘게 썰어낸 제주 한치 회 위에 조개로 만든 젤리와 제주 해초를 곁들였고, 얼음 육수는 바지락과 약간의 꽈리고추로 완성했다. ‘물이 없는 물회’지만 한 스푼 떠먹으면 제주 해안가에서 맛볼 수 있는 시원한 물회를 연상하게 된다.
‘불’이란 이름의 제철 생선 요리는 제주산 옥돔을 불에 살짝 구워낸 메뉴다. 지리산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산되는 장인의 숯을 이용해 불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함께 곁들여진 소스는 대게와 고추장으로 만든 비스크 소스로, 고소한 맛이 빵과도 잘 어우러진다. 같이 제공되는 빵 역시 전통적인 술빵처럼 누룩으로 발효해 만들어 한국적인 맛을 배가했다. 갓 모양의 그릇에 담겨 나오는 ‘갓’은 코스에 부드러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양파소스와 부드럽게 익힌 전복과 달콤한 무 위에 김으로 만든 달콤한 덮개가 있는데, 쿠키처럼 스푼으로 부신 뒤 요리와 함께 떠먹으면 된다.
‘한우’는 채끝 등심을 얇게 저며 천천히 익힌 것인데, 우엉으로 만든 퓌레와 한우를 장시간 고아서 만든 오일 소스를 함께 제공한다. 그 위에 올린 절인 호두 슬라이스는 부드러운 고기와 함께 먹을 때 재미있는 식감을 더해 준다. 이때 같이 제공되는 귀도쌀밥과 모과로 만든 ‘떠먹는’ 김치 역시 특별하다. 귀도쌀밥은 에빗 팀이 경기도 고양시에서 직접 모내기에 참여하기도 한 우보 농장에서 공수한 귀도쌀을 석장염으로 간을 해 오리온의 ‘닥터유(Dr.You) 제주용암수’로 지어낸다. 석장염은 간장에서 나오는 소금으로, 간장이 7년 넘게 숙성되면 염분이 굳어 생기는 귀한 소금이다. 닥터유 제주용암수는 미네랄이 풍부한 용암해수를 원수로 한 물이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공간에빗은 한국 토종 벼의 복원과 재배를 위한 토종 벼 모내기, 한국의 장(간장 고추장 된장) 알리기 등 다양한 한국 식문화 확산 활동도 하고 있다. 리저우드 셰프는 “우리는 토종 쌀 품종과 전통 소스를 활용하면서 한국의 식문화를 보존하고, 동시에 진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재료들은 수 세기 동안 이어진 농업과 요리의 지혜를 상징한다”며 “이들의 현대적 가치를 입증하고 지속 가능한 전통 유지에 기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에빗은 계절성과 재료의 가용성, 혁신과 전통 기술에 대한 존중의 균형, 전통 한국 술과의 페어링을 포함한 조화, 재료와 조리법 간의 의미있는 연결, 기술적 실행과 일관성 등 4가지 철학을 바탕으로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 다만 리저우드 셰프는 “에빗은 단순히 한 가지 카테고리로 정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의 식재료를 사용하고 전통 한국 술과 페어링하지만, 엄밀히 말해 ‘한식 레스토랑’은 아니다”라며 “에빗은 현대적인 파인 다이닝이지만, 한국의 식문화를 깊이 존중하며 이를 현대적 조리 기법과 결합해 전통과 현대의 대화를 만들어간다”고 말했다.
리저우드 셰프는 최근 ‘흑백요리사’에 참여한 소감에 대해서도 밝혔다. 그는 ‘백수저 셰프’(유명 셰프)로 출연해 2라운드에 진출했지만 ‘요리하는 돌아이(윤남노 셰프)’와의 대결에서 아쉽게 졌다. 그는 “우리의 요리 철학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였다. 비록 저는 주방에서의 작업에 집중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파인 다이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한국 요리의 진화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리저우드 셰프는 “앞으로 에빗의 목표는 경계를 계속 넓혀가면서 한국 식재료와 기술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것”이라며 “개인적으로는 전통 재료와 조리법에 대한 연구를 더욱 발전시키고, 전통과 혁신의 대화를 이어갈 다음 세대 셰프를 양성하는 데 힘쓰고자 한다. 전통 농업과 생산 방식을 지키고 있는 소규모 생산자들을 더욱 지원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에빗(EVETT)장르 이노베이티브
위치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10-5 1층
헤드 셰프 조셉 리저우드
영업시간 화·수 17:30~22:30, 목·금·토 12:00~22:30(14:30~17:30 브레이크 타임), 일·월 정기 휴무
가격대 런치 코스 15만원, 디너 코스 25만원
프라이빗 룸 없음
전화번호 0507-1399-1029
주차 발레파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