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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권의 뒤땅 담화] 뒤땅 없는 골프장에 가서 골프하라고?
입력 : 2024.11.19 17:2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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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그렇다면 골프 숍에서 대가리 없는 공을 사서 뒤땅 없는 골프장에 가서 골프를 해봐~.”
한 동반자가 토핑(Topping)과 뒤땅(Fat shot) 때문에 도저히 골프를 못하겠다고 하소연하자 곁에서 듣고 있던 고수가 알려준 비결이다. 진지하게 듣다가 정신을 차리곤 모두 빵 터졌다.
구력 20년을 넘긴 지금도 필자는 잔디가 짧거나 불안정한 스탠스에선 토핑과 뒤땅 공포를 마주한다. 지난 여름처럼 그린 주변 잔디가 훼손된 경우엔 더욱 그렇다.
롱 홀에서 멋진 티샷에 이어 우드 샷으로 그린 주변으로 날린 공이 맨땅에 놓였을 때 정말 난감하다. 큰 내기라도 걸렸다면 토핑과 뒤땅 포비아(Phobia) 그 자체이다.
골프장에선 유머가 난무한다. 새로운 버전으로 유머가 더해지면서 분위기를 달군다. 고조된 긴장을 풀고 상쾌하다.
티잉 구역(Teeing area)에서 유난히 시간을 끄는 동반자가 있다. 연습 스윙을 거듭하더니 이젠 긴 명상에 들어간다.
골프를 사랑했던 고 김종필 국무총리가 말한 백구백상(白球百想)이다. 흰 공을 보면 백 가지 상념에 잡힌다는 뜻이다. 절창(絶唱)이다.
언제 치나 싶어 지켜보던 동반자들 속이 탄다. 그 때 조용하게 “뭐하나? 치고 나서 생각하지~”라는 말이 적막을 깨뜨린다.
참다 못한 선배가 멘트를 날렸다. 필자는 어느 순간부터 연습스윙을 없애버렸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샷에 영향이 없다.
그린에서 퍼트 스탠스를 잡아 놓고 상체를 구부린 상태로 하염없이 시간을 끄는 골퍼도 있다. 무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이젠 하겠지”라고 생각하고 인내하지만 기약이 없다.
급기야 속으로 “OK(컨시드)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아니냐”라는 생각이 엄습한다. 선 채로 자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누군가 “골프는 머리로 한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레슨 수용이나 코스 매니지먼트를 영리한 사람이 잘해내는 뜻인 줄로 알았다.
머리 나쁜 사람은 골프 치지 말라는 거냐고 항의하니 “헤드(Head) 업(up) 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응수한다. “그럼 머리는 헤드 업하지 않는 용도로 달고 다니는 거냐”고 다시 반박하니 그는 말문을 닫았다.
그러자 옆에서 머리는 모자를 쓰거나 인체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한 용도로 달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는 말도 터져 나왔다. 심지어 못을 박기 위한 용도라는 극단적인 발언도 있었다.
헤드 업을 방지하려는 노력이 눈물겨울 때도 있다. 어떤 골퍼가 퍼트를 하려고 자세를 취한 뒤 뚫어져라 밑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의 신발 위에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머리 들면 개OO”. 자기 주문을 외고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속어가 있다. 파를 연속 4번 잡으면 아우디, 5번이면 올림픽이라고 한다. 그럼 6번 잡으면 뭘까. 역시 ‘개OO’라고 한다. 그동안 주변에서의 칭찬이 욕으로 바뀐다.
내기 걸렸을 때 하수가 결정적인 순간에 미스 샷이라며 한탄한다. 이 때 고수의 멘트가 상처를 더한다. “난 너가 실수할까봐 더 두려워~.”
어쩌다 나오는 미스 샷이 고수가 보기엔 굿샷이고 평소 하수의 굿샷은 대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빨리 실력을 쌓겠다며 울분을 삼킨다.
멀리건을 우아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부화하지 못하는 무정란이라고 하는데 스킨스 게임에서 승자가 되더라도 상금을 못 챙기는 대신 동타를 기록하면 동반자를 잡을 순 있다. 일명 씨 없는 수박이라고 한다.
언젠가 훤칠하고 잘생긴 후배가 투어 캐디백에 일일이 커버를 씌운 고급 클럽을 들고 나타났다. 캐디도 설레는지 첫 홀부터 정성이 대단했다.
첫 홀 OB(Out of bounds)에 흔쾌히 멀리건을 준 캐디가 두번째 홀에서도 나온 OB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멀리건을 주었다.
세 번째 홀에서 패널티구역(해저드)으로 후배가 공을 날리는 순간 지체없이 “그냥 가시죠”라고 말했다. 캐디는 후배가 들리지 않게 “클럽 보고 프로선수인 줄 알았었요”라고 귀뜸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선배가 “복장은 아예 PGA 선수급이야”라고 말했다.
“그럼 왜 물어본 거야?” 동반자가 퍼트를 마치고 아쉬워하자 옆에서 다른 동반자가 날린 멘트다. 연속 세번이나 캐디에게 오르막이냐고 물어보더니 결국 공이 핀에 미치지 못한 것을 두고 비꼰 말이다.
“5번이나 거리를 불러줬어요.” 캐디가 파3 홀에서 핀까지 거리를 불러준 횟수라고 말했다. 카트에서 내릴 때, 대기할 때, 첫 플레이어 시작할 때를 포함해 침이 마르도록 말해줘도 꼭 또 물어보는 골퍼가 있다.
“5번이나 거리를 불러줬어요.” 캐디가 파3 홀에서 핀까지 거리를 불러준 횟수라고 말했다. 카트에서 내릴 때, 대기할 때, 첫 플레이어 시작할 때를 포함해 침이 마르도록 말해줘도 꼭 또 물어보는 골퍼가 있다.
캐디가 말할 때 딴청부리다가 못 듣기도 하고 듣고서도 잊고 또 묻는다. 요즘은 거리측정기가 있어 별 문제 없지만 번갈아 캐디에게 거리를 물어보면 캐디 입장에선 힘들 것도 같다.
유머는 아니지만 황당한 경우도 있다. 긴장과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티샷을 날리자마자 한 동반자가 “굿 샷~”이라고 외쳤다.
혼자 핸드폰을 보다가 동반자가 클럽으로 공을 때리는 소리를 듣곤 보지도 않고 터져 나온 찬사였다. 공은 허공에 긴 포물선을 그리더니 숲 속 OB구역으로 날아갔다.
플레이어는 물론 동반자들과 캐디마저 놀란 표정이었다. 딴청 부리다가 영혼 없는 멘트를 습관적으로 날린 것이다. 골프장에선 이처럼 빈말도 난무한다. 간혹 구찌(입방아)로도 사용된다.
“아직도 골프 신동이야”. 필자는 오랫동안 정말 골프에 재주가 있는 줄 알았다. 늘 나를 골프 신동이라고 치켜세우던 선배가 다른 초보 2명에게도 똑같이 말하는 것을 보고서야 빈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골프 신동이란 용어는 스코어가 엉망인 초보에게 싫증과 열등감을 덜어주고 격려하는 빈말이어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골프에 발을 들인 지 10년 넘도록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면 연습 좀 하라는 충고로 알아들어야 한다.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
매일경제신문에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와 연을 맺었다. <주말골퍼 10타 줄이기>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었다. 매경LUXMEN과 매일경제 프리미엄 뉴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