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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탄생 150주년 맞은 영국의 국민작곡가, 여왕 장례식에 울려 퍼진 본 윌리엄스의 음악
입력 : 2022.10.31 11: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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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9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엄수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장례식은 한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의식이었다. 무려 70여 년간 재위했던 여왕이 하필 이 시점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은 그저 한 나라에 국한된 사건 이상인 듯했다. 바야흐로 코로나 사태가 ‘엔데믹’을 향해가고 있는 와중에 말 많던 ‘브렉시트’의 후과가 본격화하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국제정세와 경제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잠시 구경만 하려던 장례식 중계방송을 한참 동안 켜놓고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었다. 물론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그 상념 중 일부는 음악에 관한 것이었다. 영국 여왕의 장례식과 관련 예배에서 울려 퍼진 곡들을 쓴 이들은 오를란도 기본스, 휴버트 페리, 에드워드 엘가, 허버트 하웰스, 주디스 위어, 제임스 맥밀란 등 거의 영국 작곡가들이었다. 유일한 예외로 바흐의 오르간 곡이 있었고, 의식 전후에는 베토벤과 쇼팽의 장송행진곡 등이 연주되기도 했지만 대개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영국 음악’이 주류를 이루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그리 대접받지 못하는 영국 음악의 저력을 새삼 돌아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런데 그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르가니스트이자 합창단장인 제임스 오도넬의 지휘로 웨스트민스터 합창단과 왕실 성가대가 부른 노래들 중에는 시편 34편에서 가사를 취한 ‘오, 주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 맛보고 보라(O taste and see)’도 포함돼 있었다. 연주시간 1분 30초 남짓한 이 정결하고 숭고한 성가는 1953년 여왕의 대관식에서도 연주됐던 곡이다. 그리고 당시 이 곡의 작곡을 의뢰받았던 이는 지난 10월 12일 탄생 150주년 기념일을 보낸 랠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 1872~1958년)였다.
그 결과로 그의 음악은 뼛속까지 ‘영국적인’ 특색을 띠게 되었고, 그가 남긴 9개의 교향곡과 관현악, 영화음악과 밴드음악, 가곡과 오페라, 그리고 수많은 합창곡들은 20세기 영국 음악의 부흥을 주도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민족주의 음악가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은 체코의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나 러시아의 모데스크 무소르그스키에 견줄 만했다.
다만 그의 ‘영국적 개성’이 온전히 나래를 펼치기 위해서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런던의 왕립음악대학과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대학에서 공부하던 학창시절에 그는 열의는 가득하되 진보는 더딘 학생이었다. 학업은 음악과 인문학 사이에서 5년간 지속되었고 스승들은 때로는 격려를 때로는 비판을 가하여 그의 앞길을 굴곡지게 만들었다. 졸업 후 한동안 교회 오르가니스트 겸 합창지휘자로 일하던 그는 스물다섯에 결혼한 다음 신혼여행 차 방문한 독일 베를린에서 몇 달 동안 머물며 막스 브루흐에게 배웠다. 브루흐와의 수업은 그에게 낭만적 감수성을 일깨워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앞날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에도 ‘막다른 길’에서 방황하던 그는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자신보다 세 살 어리지만 훨씬 유명한 모리스 라벨에게 배움을 청했다. 라벨과의 만남은 그에게 ‘예술적 문제들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고, 선율 대신 음색의 관점에서 관현악을 통하여 자신만의 지평을 열어갈 방법론을 터득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영국 민요에 기초한 ‘푸른 옷소매 환상곡’과 르네상스 시대 선율을 취한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김연아 선수의 시니어 무대 데뷔곡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바이올린곡 ‘종달새는 날아오르고’, 그리고 보다 본격적인 대작 ‘교향곡 제5번’ 등의 대표작들을 통해서 본 윌리엄스의 더없이 영국적인 음악세계에 발을 들여보는 것은 어떨까?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6호 (2022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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