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인공지능 예술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입력 : 2022.10.13 15:19:48

  • 로봇의 시대다. 키오스크에서 인공지능까지 자동화의 물결이 나날이 일상을 파고든다. 지금껏 인간이 해오던 일이 하나둘 사라지는 시대이기에 ‘창조력’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빠르게 높아지고 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일까.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에서 과연 인간만이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미국 콜로라도주 아트페어에서 제임스 앨런의 ‘오페라하우스(Theatre D’opera Spatial)’란 작품이 디지털 부문 대상을 받았다. 오페라 공연을 묘사한 이 작품은 사실 미드저니(Midjourney)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작가가 몇 가지 키워드를 넣어서 생성한 것이다. 대단히 창조적인 작품은 아니다. 어디선가 한 번은 본 듯한 클리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동시에 아트페어에서 대상을 차지할 만큼 ‘충분히’ 창조적이다. 평균적 인간 역량을 넘어섰다는 뜻이다.

    작품을 둘러싸고 흥미로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인공지능이 생성했으니 작품이 아니라는 미학적 주장, 저작권이 앨런이 아니라 프로그램 회사에 있다는 법적 논란 등 그 층위가 다양하다.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체스, 바둑 등에 이어서 예술 같은 창조적 작업마저 로봇과 경쟁하는 징후를 보여 준다.

    ‘오페라하우스’는 인공지능이 ‘창조’한 게 아니다. 100년 전에 마르셀 뒤샹이 기성품 변기에 서명을 덧붙여 ‘샘’이라는 작품을 창작하면서 보여준 것처럼, 현대 미술에서 누가 제작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술가가 의미를 부여하고 서명할 때 작품이 생겨난다. 인간이 전적인 행위자가 되는 것이 예술 창조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사진설명
    모든 예술은 당대의 최첨단 기술과 공진화해왔다. 표현력은 좋고, 보존은 잘 되는 물감을 싫어하는 화가도, 대리석을 잘 잘라주고 표면을 자유자재로 다듬어주는 도구를 싫어하는 조각가는 거의 드물다. 1920년대에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영사기로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었고, 1960년대에 백남준은 텔레비전과 신시사이저로 조각하는 조각가가 되었다.

    포토샵으로 디자인하는 디자인 예술가들처럼 제임스 앨런은 인공지능으로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장르의 화가가 되었을 뿐이다. 앨런이 처음 이 일을 한 건 아니지만, 독특한 감식안과 과감한 구상으로 하나의 문턱을 넘어선 점은 흥미롭다. 앨런 대신 인공지능이 스스로 키워드를 넣어서 예술적 이미지를 생산하는 일도 물론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작품으로 만드는 행위는 ‘아직’ 인간의 일이다. 반복하지만, 제작이나 생산이 아니라 누군가 ‘예술이라는 코드’를 삽입할 때 작품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인간 의식에 충격과 경이를 일으키는 일, 이것이 창조의 한 줄기이다. 이 일을 해내려면 고도의 자아의식이 필요하다.

    사실, 인간 창조력을 생산의 측면에서 ‘참신하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능력’으로 정의하는 건 너무 자본주의적이다. 이런 정의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미국에서부터이다. ‘브레인스토밍’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앨릭스 오즈번이 쓴 <당신의 창조력>, <당신의 마음을 깨워라> 같은 책이 큰 영향을 끼쳤다. <창조력 코드>(북라이프 펴냄)에서 마커스 드 사토이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창조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이해하려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창조란 초연한 태도로 세상 속에서 자기 위치를 확인하려는 노력이자 자아가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 살피는 성숙과 확장의 과정이다. 미국 심리학자 칼 로저스의 말처럼, 창조란 “자아를 실현하며 잠재력을 발휘하려는 경향”이다. 이카루스는 새롭고 쓸모 있는 것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한테 태양까지 날아갈 역능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날개를 창조했다. 자아 없는 창조는 소 없는 만두나 다름없다. 창조 행위에는 만들어진 물건보다 불어넣은 자아가 중요하다. 인류가 물건에 생각을 부여하는 능력은 약 330만 년 전에 우연히 나타났다. 직립보행으로 인해 발달한 뇌와 자유로워진 손이 일으킨 인류사적 사건이었다. 한 집단이 돌을 특정 방식으로 내려쳐 뗀석기 만드는 법을 떠올린 후, 굳센 자제력과 끈질긴 노력으로 이를 실현하고, 언어와 몸짓을 이용해서 서로 전수했다. 이로써 예측하고 계획해서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이 인류의 기본 능력이 되었다. 예술이 언제 진화했는지 불분명하나, 약 4만 년 전에는 확연히 자리 잡았다. 이 무렵 악기가 등장하고, 조각상이 탄생하며, 암각화가 등장했다. 목걸이 같은 공예품은 이미 약 15만 년 전부터 존재했다.

    인류는 ‘나’ 또는 ‘우리’라는 정체성, 즉 신분이나 종족 등을 물건에 담아서 타인에게 표시했다. 자아가 목걸이, 즉 예술품을 만들어냈다. 예술이란 자아를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사물에 옮겨 담아 타인과 나누는 행위이지 물건의 발명 자체와는 별 상관이 없다. 예술은 자기 발견 수단이자, 자기표현 과정이다. 이 탓에 예술은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의 징검다리이면서 자기 감각을 확장·발달시키는 도구가 된다. 누군가의 개인적·사회적 자아가 담겨 있는 예술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감정과 생각, 경험과 사상 등을 느끼고 배우고 인지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자아를 증강할 수 있다.

    영국 작가 조지 엘리엇은 말한다. “예술의 가장 큰 혜택은 공감대의 확장이다. 예술은 개인적 운명의 틀 밖으로 경험을 증폭하고, 타인과 교류를 확대하는 한 방법이다.” 공감의 크기가 곧 예술의 영향력이고, 이는 때때로 인간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사회 속에서 탄생하는 예술이 사회에 갇히기보다 사회를 강화하고 확장하는 이유이다. 예술은 ‘소수자 감정’을 ‘모두의 감정’으로 만들고, 수많은 자아를 공명시켜 사회적 자아를 창출한다. 예술이 없다면 사회는 불가능하다.

    사토이에 따르면, 자아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다. 평생에 걸쳐 인간은 자신을 더 진실하고, 더 선량하며, 더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하는 데 오롯이 헌신한다. 형편없는 인간이 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타인이 우러르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예술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아를 창조하는 과정의 부산물 또는 파생물”이다. 자기와 타자에 대한 깊은 성찰 없는 창조성은 불가능하다. 인공지능 예술은 우리에게 이를 가르쳐 준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5호 (2022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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