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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외로움은 느낌이고, 고독은 능력이다
입력 : 2022.08.02 13: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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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불 꺼진 방에 홀로 우두커니 서서 하염없이 어두운 창밖을 내다본 경험이 있을 테다. 눈이 내다보는 건 바깥의 짙은 어둠이지만, 마음이 들여다보는 건 내면이리라. 비에 젖은 어두운 거리를 내다보던 청년 윤동주는 그럴 때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돌아와 보는 밤’) 간다고 노래했다.
시인은 먼저 세상으로부터 돌아와 ‘좁은 방’에 자신을 유폐한다. 불도 안 켠 채 침묵 속에서 울분을 삭이면서 짙은 고뇌를 거듭한다. 인간은 깊은 고독의 밤을 통해 비로소 내면의 물결 소리를 듣고 번민의 불길을 태워서 자기만의 오롯한 생각을 이룩한다. “홀로 있음은 위대한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모태이고 조건이며, 고귀하고 숭고한 모든 것의 뿌리이며 토양이다.” 철학자 박이문의 말이다. 혼자만의 시간 없이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몽테뉴도 그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성안 작은 탑을 개조해 서재를 마련하고, 곳곳에 인생 격언을 새겨 생각의 재료로 삼은 후 그 안에 자신을 가두었다. 몽테뉴는 이곳을 치타델레(Zitadelle)라 불렀다. ‘요새’라는 뜻이다. 세상의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생을 탐구하려는 의도였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불멸의 저작인 <에세>이다. 위대한 창조자들은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어 보이는 밤을 통해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 ‘홀로’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먼저, ‘혼자 됨’은 생명체의 근본적 존재 양식이다. 모든 생명체는 홀로 태어나서 홀로 죽는다. 아무도 대신 태어나 줄 수도, 대신 죽어 줄 수도 없다. 이 우주에 ‘나는 나 하나뿐’이라는 단독성은 인간 존엄의 기초를 이룬다.
‘홀로’는 또한 외로움과 고독을 낳는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외로움(loneliness)이 ‘내몰린 혼자’라면 고독(solitude)은 ‘스스로 혼자’이다. 외로움은 피동이고, 고독은 능동이다. 외로움이 관계를 아무리 바라도 가족이나 친구나 동료가 곁에 없어서 사무치는 괴로운 심정이라면, 고독은 번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떼어놓음으로써 내면에서 일어서는 평온한 기분이다. 외로움은 인간을 파괴하나, 고독은 인간을 풍요롭게 한다. 윤동주도, 몽테뉴도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을 누렸다.
요하임 바우어의 <공감하는 유전자>(매일경제신문사 펴냄)에 따르면, 차별과 무시의 경험은 인간을 깊은 충격과 슬픔에 빠뜨린다. 외로움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수명을 줄어들게 만든다. 외로움이 심해지면 인간은 공격적으로 변한다. 공격성은 신체 공격과 혐오 경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고 진화했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느끼는 일은 신체를 공격당하는 일과 같으므로, 소외된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공격하거나 자신을 방치한 타자와 세상에 대한 역공에 나선다. ‘사이코패스’나 ‘외로운 늑대’는 개인적 성향보다 사회적 소외의 결과이기 쉽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이들이 보내는 절망과 분노의 신호를 공동체가 무시할 때 끔찍한 테러가 일어난다. 고립의 사회는 곧 분노의 사회이고 혐오의 사회이며 공포의 사회이다. 사회에 외로움이 만연하면 ‘함께 삶’의 감각을 잃어버린 이들이 폭주하는 생지옥이 펼쳐진다. 외로움은 줄일수록 좋다.
고독은 다르다. 외로움은 고통의 감정이나, 고독은 심리적 능력이다. 영국 심리학자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책읽는수요일 펴냄)에 따르면, 혼자 있는 능력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친밀성만큼이나 인간의 성숙에 중요하다. 고독 속에서 인간은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을 극복하며 굳어진 생각을 전환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어린아이는 부모 없이 혼자 있을 때 자아의 독립성을 발견한다. 부모의 기대가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바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 ‘진짜 자아’를 구축한다. 결과는 흔히 어지럽힌 집안이나 망가진 가전제품으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스토는 말한다. “혼자 있는 능력은 학습과 사고와 혁신을 가능하게 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상상이라는 내면세계와 접촉하게 하는 귀중한 자질이다.” 세상에서 번잡한 인간관계에 시달리다 보면 ‘고독력’이 서서히 소진된다. 그런데 홀로 자신과 대화하면서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정신의 주체성을 잃는다. 니체가 “성대하게 차려입고 요란을 떠는 어릿광대”에 홀리지 말라고 경고한 이유다. 고독을 잃으면 내밀성이 무너지면서 자아의 자립성도 증발한다. 바깥의 시선에 상관없이 자신을 채울 힘이 소실되고,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공허한 삶이 펼쳐질 뿐이다.
고독을 충전할 시간이다. 니체는 외쳤다. “벗이여,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사납고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고독의 사나운 영토로 은둔할 때 우리는 번잡한 일상에 빼앗긴 힘을 돌려받는다. 카프카, 베토벤, 스피노자, 칸트, 비트겐슈타인, 뉴턴 등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고독을 창조의 텃밭으로 썼다. 세상과 자신을 단절하고 사색하면서 ‘나 홀로 분투’를 반복했다. 영감의 비료를 뿌리고 사유의 물을 공급하면서 사유의 능금을 달콤하게 익혀 갔다.
고독의 촉매가 없다면 빛나는 아이디어도, 위대한 혁신도 없다. 황동규 시인은 창밖 검은 세계를 받아들여 환한 빛으로 가공하는 것을 ‘홀로움’이라 불렀다.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좋은 삶이란 슬픔을 길들이고 절망을 넘어서는 일, 즉 외로움을 환하게 만드는 일이리라. 고독할 용기를 품고 삶의 흩어진 구슬을 꿰어 ‘나다운 나’를 써나가는 것일 테다. 고독을 누리면서 자기를 아름답게 가꿀 줄 아는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 니체는 말했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자들은 예부터 장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왔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3호 (2022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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