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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속도에서 깊이로
입력 : 2022.07.07 15: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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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계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 해 만에 처음으로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해지면서 벼르던 휴가 계획들이 넘쳐난다. 휴(休)는 본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표창하는 일’이었다. ‘행복하다, 좋다, 경사스럽다, 기쁘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였다. 후대에는 표창과 함께 직무를 떠나서 집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게 했기에 ‘쉬다’라는 뜻이 파생했다.
그러나 휴가 여행이 시달림과 불쾌함과 피로를 낳지 않도록 기쁘고 행복하게 쉬는 일은 쉽지 않다. 한 언론사 조사에 따르면, 휴가를 다녀온 직장인 중 42.1%는 휴가 때 충분히 쉬지 못했고, 32.3%는 쉬었으나 쉰 것 같지 않았다고 느꼈으며, 8.1%는 전혀 쉬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도대체 어떻게 쉬어야 잘 쉬는 것일까?
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의 라틴어 어근 vac-는 ‘비우다, 자유로워지다’의 의미이다. 휴가는 무엇보다 밥벌이를 위한 부자유에서 놓여나는 일이고, 일을 비워서 노동으로 지친 몸을 달래고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나 좋은 휴가라면 흐느적대는 마음도 일으켜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에 여가를 빼앗길 뿐만 아니라 정보에 마음의 여유를 착취당하기 때문이다. 화면 연결이 촘촘해질수록 우리 마음도 바빠진다. 급속한 작업 전환, 높은 수준의 자극이 반복되면서 주의 과잉에 빠져 한순간도 쉬지 못하는 것이다. 몸은 하나인데 마음이 열 개여도 부족하다면 무거운 피로가 누적되는 것은 당연하다.
2500년 전 그리스 아테네의 의사 아쿠메노스의 충고이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오는 말이다. 이 대화록의 주인공은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이다. 번잡한 아테네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성 밖 강변을 따라 산책하다가 키 큰 플라타너스 아래 자리 잡고 너덧 시간 정도 서로 대화를 나눈다. 파워스는 짤막한 이 이야기를 통해 지친 자아를 위한 ‘좋은 휴식’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먼저, 두 사람은 북적이는 아테네 시내를 벗어나 성 밖의 멋지고 고요한 장소를 찾아갔다. 소크라테스는 풍경과 나무는 자신에게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않으며 사람들에게서만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처럼 소크라테스도 자연에서 사랑스럽고 순수하고 깨끗한 물에 발을 담근 채 대화하는 경험은 드문 일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거리 대화에서 진리와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아테네 거리는 소크라테스의 작업장인 동시에 소셜네트워크였다. 자신을 자랑하고 타인의 관심을 끌어 이익을 얻고자 하는 활동들, 소음들, 주장들이 넘쳐났고, 소크라테스는 쏟아지는 언어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 시선을 빨아들이는 최고의 소피스트, 즉 소셜 인플루언서였다.
파이드로스 역시 그 안에서 열렬하게 활동했다. 소크라테스를 만나기 이전에 그는 리시아스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와 달리,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서 그 뜻을 음미하고 암송함으로써 새로운 정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 했다. 상쾌한 자연 속에서 자신과 타인 간의 거리를 되찾고, 고요히 휴식하면서 내적 대화를 통해 감동을 깨달음으로 바꾸려 한 것이다.
파이드로스가 옳다. 거리의 어지러움과 대화의 분주함을 벗어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나를 되찾으려면 조용한 곳에서 산책하면서 홀로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스탠퍼드대학이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바깥으로 나가 6분 동안 짧게 산책을 즐긴 사람들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보다 창의력이 60% 높게 나타났다. 아이디어엔 발이 달려 있다. 숲을 산책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집중력을 높이며 긍정적 사고와 도전 지향적 행동을 부추긴다.
성 밖 개울가를 찾은 것도 훌륭했다. 인간의 내적 대화는 자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자연은 탈진한 신체를 회복하고 소진된 마음을 채우며, 흐트러진 주의력과 메마른 감성을 되살린다. 주기적으로 정신을 녹화(綠化)하지 않으면, 마음은 방전되고 공감은 얕아진다. 휴식은 사람 없는 한적한 자연에서 가벼운 산책을 즐기면서 하는 게 최상이다. 거리 예찬자 소크라테스조차 나중에는 “이 장소에 신성한 기운이 있는 것 같다”면서 신이 자신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음을 고백한다.
또한 두 사람은 서로 온전히 집중하면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주변 신호에 정신이 산만해지지도, 온갖 소음에 방해받지도 않았다. 집중된 대화는 인류 진화의 위대한 동력이다. 대화를 통해 인간은 나의 체험을 공동의 경험으로 만들고, 찰나의 의미를 모두의 깨달음으로 확산하며, 공감과 친밀성을 증진해 단단한 관계를 이룩한다. 파이드로스는 고독을 잃었으나 지적·정서적 친밀감 속에서 소크라테스와 함께 새로운 정보를 검토함으로써 큰 지혜에 이를 수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의 친밀한 대화는 언제나 삶에 의미와 깊이를 돌려주는 진짜 휴식을 가져온다. 윌리엄 파워스는 말한다. “경험의 깊이는 전적으로 삶을 끌어당기는 영혼의 능력에 달려 있다.” 쉬었으나 쉰 것 같지 않은 휴가를 보내지 않으려면 한적한 자연을 찾아 걷고 생각하고 대화하면서 영혼의 깊이를 더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2호 (2022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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