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타인의 신발을 신는 마음

    입력 : 2022.06.09 11:08:12

  • “기계는 멋지지만, 인간은 따뜻하다.”

    필립 코틀러는 <마켓 5.0>(더퀘스트 펴냄)에서 오늘날 마케팅의 핵심을 간결하게 한 줄로 정리한다. 이때 기계는 ‘인공지능’을 뜻한다. 현대 마케팅에서 인공지능은 매력적 고객 경험을 창출하는 데 필수적이다. 인공지능은 방대한 고객 데이터를 분석해 특정 시장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것은 판매를 내다보고 제품을 추천하며 고객 이탈 징후를 감지하는 등 인간을 뛰어넘는 예측력을 보여주고, 제품과 서비스를 고객 각각의 선호에 맞추어 개인화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러나 기계만으론 충분치 않다. 아무리 편리해도 키오스크는 인간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외상을 청하는 가난한 모녀에게 무료로 치킨 두 마리를 건네거나 굶주린 노숙자에게 국수 한 그릇을 내밀지 못한다. 진짜 고객 경험에는 상식과 직관에 바탕을 둔 인간적 따뜻함이 필요하다. 융통성 있게 상황을 파악해서 지혜롭게 움직이는 인간이 있을 때 기술이 제공하는 속도와 효율성은 올바로 작동한다. 고객과 진심 어린 인연을 맺는 데 인간은 영원히 대체 불가능한 존재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소피아(sophia)와 프로네시스(phronesis)로 나누었다. 소피아가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지혜라면, 프로네시스는 “어떤 일을 행할 때 인간에게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따지는 지혜”다. 논리적이더라도 인간에게 나쁜 일은 안 해야 하고, 논리적이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좋은 일은 해야 한다. 실행에 필요한 지혜이기에 프로네시스를 ‘실천적 지혜’라고 한다.

    인공지능은 소피아, 즉 논리적 사고나 계산 능력에서 인간을 압도할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상황에 맞추어 적절히 행동하는 프로네시스를 대체하진 못한다. 지능과 지혜는 다르다. 똑똑해도 바보처럼 행동할 수 있고, 바보라서 오히려 지혜로울 수 있다. 코틀러는 인간다움을 무시하고 행동하는 ‘똑똑한 바보’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경고한다.

    2017년 데이비드 다오는 미국 유나이티드 항공사의 비행기에 탑승했다 강제로 쫓겨났다. 논리적으론 타당했다. 항공사 직원들이 급히 비행기를 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다오를 그 대상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탑승 실적과 좌석 등급으로 볼 때 향후 수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문제는 다오가 이튿날 환자를 돌봐야 하는 의사였다는 점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었고 유나이티드 항공은 이미지에 심한 손상을 입었다. 코틀러는 말한다. “통찰력을 끌어내 적절한 결정을 내리려면 지혜를 활용해야 한다. 인간은 종종 인공지능이 권하는 결정을 무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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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과 행동 사이에 지혜가 없으면 헛똑똑이 바보에 불과하다. 이성적·객관적 인식에 더해서 타인의 마음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힘이 있을 때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인간관계 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온 보이지 않는 통찰력, 즉 편견 없는 지성, 훌륭한 판단력, 윤리적 고려를 고루 갖춘 지혜가 있어야 훌륭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코틀러식으로 말하면, 멋진 기계와 따뜻한 인간의 협동은 사업의 성공과 인생의 행복을 가져다준다.

    실천적 지혜를 갖춘 따뜻한 인간의 바탕에는 ‘공감(共感)’이 있다. 브래디 미카코의 <타인의 신발을 신어 보다>(은행나무 펴냄)에 따르면, 공감은 동정(同情)과 다르다. 우리말은 두 말을 흔히 혼용하지만, 영어는 둘을 구분해 쓴다. 동정(sympathy)이 타자의 불쌍한 처지를 가엾게 여기는 ‘감정’이라면, 공감(empathy)은 자신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판단력을 유지한 채 타인의 감정이나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동정이 불쌍한 일을 대할 때 내 안에서 자연스레 배어나는 정서 작용이라면, 공감은 다른 사람 입장에 서서 따지고 생각하는 지적 작업이다. 타고난 성품이 아니기에 공감은 배워서 익혀야 갖출 수 있는 역량이며, 또한 순간순간 상황에 맞추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비로소 발현되는 능력이다. 공감은 언제나 공감력(共感力)으로만 존재한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잠재적 역량을 타고난다. 뇌 속에 있는 ‘거울 뉴런’은 우리가 타인의 행동을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그 의도를 읽어내서 마치 그 행동을 자기가 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우리의 타고난 공감력은 어린 시절 강력한 나르시시즘에 지배되면서 빠르게 소진된다. 공감력 훈련을 받지 않으면 아이는 타자를 자신의 소망과 감정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로만 여긴다.

    특히 타인의 깊은 내면을 인식하면서 타인과 관계하는 높은 수준의 공감력은 애써야 얻을 수 있다. 미카코에 따르면, 공감력이 있는 사람은 남의 신발이 아무리 냄새나고 더럽더라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그 신발을 신을 수 있다. 이런 행동은 타인에게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성질이 있더라도 그 존재를 인정하고 상상하는 축적된 지적 훈련 없이 함양되기 힘들다. 논리력만큼이나 공감력도 배워야 생긴다.

    공감에는 인지적 공감, 감정적 공감, 신체적 공감, 동정적 공감이 있다. 인지적 공감은 타인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전면적이고 정확한 지식을 얻는 능력이다. 미카코는 이를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상상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감정적 공감은 타인과 같은 감정을 느끼거나 타인의 처지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품는 힘이다. ‘동정’과 비슷하다.

    신체적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자기 몸에서 물리적 통증을 느끼는 힘이다. 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타인이 상처를 입는 장면을 보면 앓아눕기도 한다. 동정적 공감은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이해하고 느끼는 수준을 넘어서 그를 위한 행동을 일으키는 힘이다. 붓다의 자비(慈悲), 예수의 사랑, 공자의 인(仁) 같은 것일 수 있겠다. 인지적 공감에서 출발해 동정적 공감에 이르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프로네시스를 갖춘 따뜻한 인간이 되는 길이다.

    오늘날 세상은 ‘멋진 기계’엔 많은 신경을 쓰지만, ‘따뜻한 인간’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러나 타인의 마음에 접속할 수 없는 무능력은 삶을 사막으로 만들고, 조직을 실패의 굴레로 몰아넣는다. 공감력을 잃고 타인을 지옥으로 여기면 자신도 지옥에서 살게 된다. 모든 이기주의자는 불행하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1호 (2022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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