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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에서 만난 미켈란젤로와 다비드상
입력 : 2022.05.04 10:5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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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년 문화예술의 중심도시인 피렌체에는 그야말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다. 1499년 밀라노 스포르차 궁정에서 일하던 다빈치가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점령하자 제자들과 함께 고향 피렌체로 돌아와 그 유명한 <모나리자>를 그리고 있었고, 미켈란젤로도 프랑스군을 피해 로마, 시에나, 베네치아, 볼로냐 등을 전전하다가 피렌체에서 <다비드상>을 완성했다. 또한 우르비노에서 활동하던 19세의 청년 라파엘로도 피렌체로 자리를 옮겨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천재들이 쌓아 올린 예술의 극치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비단 3명의 예술가 말고도 보카치오,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를란다요, 베로키오, 단테, 보티첼리, 마키아벨리 등 피렌체가 배출한 예술가들의 업적과 그들의 삶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꽃의 도시’로 불리는 피렌체이다. 도시의 역사는 BC 59년 로마의 카이사르가 아르노강 주변에 식민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작됐다. 그때 도시의 이름은 라틴어로 ‘흐름’을 뜻하는 ‘플루엔티아’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꽃이 피어난다’라는 뜻의 플로렌티아로 이름을 바꿨다. 15세기부터 급부상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통치하면서 유럽에서 경제와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성장시켰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메디치 가문은 브루넬레스키를 통해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일명 ‘두오모 성당’)의 쿠포라를 완성했고, 13세의 미켈란젤로를 발견해 그에게 조각 공부를 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보티첼리, 다빈치, 라파엘로 등 수많은 예술가를 지원해 피렌체 예술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다비드상> 시뇨리아 광장
안타깝게도 너무나 아름다운 대리석은 조각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크기가 쪼그라들었고, 1501년 추진위원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멋진 예술작품으로 탄생시켜줄 예술가를 다시 찾았다. 이때 시민들은 르네상스 최고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맡아주길 바랐지만, 결과는 25세 청년 미켈란젤로가 맡게 되었다. 그는 피렌체시 주재로 열린 공청회에 참석해 밀랍으로 만든 다비드 모형을 보여주면서 추진위원들을 설득했다. 마침내 미켈란젤로는 1501년 10월부터 일을 시작해 2년 안에 작품을 완성하기로 계약을 맺었고, 25년 만에 대리석 돌덩이에 다비드의 영혼과 자유 정신을 새겨 넣는 데 성공했다.
고대 이후 나체로 제작된 조각상 중에서 가장 커다란 높이 5.17m의 <다비드상>은 1504년 9월 8일 시뇨리아 광장에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하지만 1512년 공공장소에 설치된 조각상은 벼락을 맞아 조각 받침대가 일부 손상을 입었고, 1527년에는 메디치 가문의 추종자와 공화정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건물 안에서 날아온 의자에 다비드 팔이 부서졌다. 그 후 300여 년 동안 시뇨리아 광장에 서 있던 다비드는 비바람과 햇빛에 의해 점점 더 색이 변하고 마모가 심해졌다. 또한 1843년 보수 작업 때 철 수세미로 표면에 묻은 오물들을 깨끗하게 닦아내면서 미켈란젤로의 섬세함도 사라졌다. 마침내 피렌체시에서 다비드를 더는 광장에 세워놓을 수 없게 되자, 1873년 7월 30일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고, 1910년 복제된 <다비드상>이 서 있게 되었다. 진품이든 복제품이든 상관없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피렌체 공화국의 의도대로 시민들의 자유 정신을 오롯이 담아내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0호 (2022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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