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도시 프랑스 아를

    입력 : 2022.04.04 17:19:54

  • 론강, 크라우 평원, 길들지 않은 땅 등 탁월한 자연환경을 품은 남프랑스의 아를은 인구 5만의 작은 도시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처럼 원형 경기장, 고대 극장, 공동목욕탕, 개선문 등 로마 유적지가 도시를 가득 메울 정도로 유서 깊은 문화의 도시이자 빈센트 반 고흐의 열정이 스민 예술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도시의 역사는 기원전 800년경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서부 일대에 거주한 리구리아인이 아를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유적과 중세풍의 고풍스러움이 혼재된 아를은 반 고흐가 오기 전까지 유럽에서 잊혀 가는 도시 중 하나였다.

    1888년 2월 19일 일요일 오후 9시 40분, 반 고흐는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가는 급행열차를 탔는데, 갑작스럽게 내린 폭설로 16시간 만에 겨우 아를역에 도착했다. 겨울철이라 땅거미는 이미 시내를 덮었고, 구시가지에 있는 카렐 호텔에서 첫날밤을 지새운 반 고흐는 눈 때문에 아를을 운명처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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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고흐는 파리와 달리 론강과 로마 유적, 그리고 소박한 도시 분위기에 만족해 더는 마르세유까지 가지 않았다. 자신이 꿈꾸던 유토피아가 아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1888년 2월 20일부터 1889년 5월 8일까지 머물며 <포럼 광장의 카페테라스> <아를 요양원의 정원> <아를의 반 고흐의 방> <론강 위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원형 경기장> <아를의 랑그루아 다리> <해바라기> 등 유화 200점과 드로잉과 수채화 100점 등 약 300여 점의 그림을 그렸고, 동생 테오에게 200여 통의 편지를 썼다. 반 고흐는 태양 아래 빛나는 색채와 공동체 작업을 위해 아를로 내려왔지만, 우리는 444일 동안 아를에서 머물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 도시를 찾는다. 매일같이 도시 구석구석을 산책한 반 고흐처럼 작품이 탄생한 배경지를 따라 여행하는 것이 여행의 백미이자 순수한 반 고흐의 영혼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본격적으로 그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은 구시가지 가장 북쪽에 있는 기차역에서 시작된다. 아를역에서 남쪽으로 5분만 걸으면 그의 대표작이 그려진 노란 집과 라마르틴 광장이 나오고, 노란 집에서 5분 거리에 원형 경기장이, 거기서 서쪽으로 5분 거리에는 포럼 광장과 카페 드 라 가르 등이 있다. 포럼 광장에서 다시 남서쪽으로 10분 거리에는 반 고흐가 정신 치료를 위해 입원했던 아를 시립병원이 있고, 구시가지 남쪽 끝에는 그가 도착하자마자 5점을 그린 랑그루아 다리가 있다. 이 외에도 밤에 가볼 만한 론강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한 <론강 위의 별이 빛나는 밤>의 배경이 된 론강은 외로움에 시달리던 반 고흐의 몸과 마음을 정화해 준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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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 집 근처에 있는 론강은 반 고흐가 1888년 9월 중순에 강과 밤하늘을 배경으로 그린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날의 감흥을 잊지 않기 위해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밤에 별이 빛나는 하늘인데 사실은 가스등 밑에서 그렸다. 하늘은 녹주석, 물은 로열 블루, 땅은 접시꽃 빛깔이고 마을은 파랑과 보라색. 가스등은 노란색, 반사된 색깔은 적갈금색에서 청동색으로. 하늘에는 큰곰자리가 녹색과 핑크로 반짝이며 조심스럽고 창백하게 잔인한 금빛의 가스등과 대비되고 있지. 가장 앞에는 화려한 연인 두 명이 서 있다.”

    밤마다 론강을 서성거리며 로열 블루, 아쿠아마린, 청동색 등 다양한 빛을 찾아낸 반 고흐는 지금도 포럼 광장에서 영업 중인 ‘밤의 카페(Cafe la Nuit)’를 대상으로 <포럼 광장의 카페테라스>를 그렸다. 이 작품도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여동생 빌레미나에게 “푸른 밤,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검은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 사용했어. 그리고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렸단다.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아를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반 고흐의 색채는 더욱 강렬해지고 밝은 분위기로 변했다. 반 고흐의 흔적 중 가보고 싶은 장소는 그의 작품 속에도 많이 등장하는 노란 집인데, 아쉽게도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888년 5월, 반 고흐는 방이 4개가 있는 노란 집을 임대하였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생활한 것은 아니고 공동체 작업을 위한 스튜디오로 사용하다가 9월 초부터 노란 집으로 이사한 뒤, 대담한 색상과 역동적인 붓놀림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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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고흐에게 있어 노란 집은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샹그릴라였다. 파리에서 느껴보지 못한 예술의 본질 속으로 한 걸음씩 천천히 들어가면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에 매일 즐겁고 행복했다. 그러나 공동체에 참가할 화가들은 거의 없었고, 1888년 10월 23일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합류한 폴 고갱뿐이었다.

    고갱이 아를에 머물던 9주 동안 반 고흐는 36개, 고갱은 21개의 유화를 각각 그렸다. 그러나 이들의 서로 다른 화풍과 다른 기질, 미학에 대한 동떨어진 인식 등 공동체 작업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한둘이 아니었다. 끝이 없는 토론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12월 23일 고갱이 파리로 떠나자 반 고흐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날 밤 반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의 일부를 잘라 매춘부에게 주는 등 정신질환에 시달렸고, 그 후 아를 시립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다.

    고갱과의 이별은 반 고흐에게 너무나 큰 상처로 남았다. 단순히 친구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꿈꿨던 공동체 작업을 통해 이루려는 예술에 대한 미래가 사라지는 것이었다. 희망이 없는 아를에서 반 고흐의 몸과 마음은 더욱 피폐해졌고, 예술에 대한 열정마저 식어갔다. 1889년 5월 8일, 동생 테오는 반 고흐를 생 레미 드 프로방스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옮겼고, 병실 하나를 더 얻어 작업실로 꾸며주었다. 이것으로 반 고흐와 아를은 영원히 이별했지만,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반 고흐의 방> 등 자신이 좋아했던 아를을 추억하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화폭에 담았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9호 (2022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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