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청소와 정리는 자신을 돌보는 신성한 일이다

    입력 : 2022.04.04 17:10:27

  • 봄날 햇볕이 따스하다. 창문을 활짝 열고, 하루 종일 청소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선다. 미세먼지 없는 날을 골라 겨우내 묵은 먼지를 내보내고, 신선한 바람이 집 안을 휘젓게 하고 싶다. 청소기를 돌리고 총채를 들어 구석구석 켜켜로 쌓인 먼지를 쓸고 떤 후, 깨끗한 손걸레에 물을 묻혀서 책꽂이, 소파, 의자, 책상, 장식장 위아래를 말끔히 닦아내고 싶다. 무엇보다 마법이라도 부려서 곳곳에 쌓아둔 책과 음반, 바닥으로 넘쳐흐르는 옷가지, 여기저기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한순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고 싶다.

    청소(淸掃)는 본래 신의 일에 속했다. 일본 문자학의 대가 시라카와 시즈카의 <상용자해>에 따르면, 소(掃)는 신성한 행위이다. 오른쪽에 붙은 추(帚)는 나무 끝에 가지를 붙여서 만든 빗자루를 형상화한 말이다. 이 물건에 향기 나는 술을 뿌린 후 손에 들고서(扌) 제사 지낼 사당에 들어가 장소를 정화하는 행위가 소(掃)다. 따라서 소(掃)에는 ‘액막이’의 뜻이 있다. 이 말에 “투명한 물의 모습”을 형용한 ‘맑을 청(淸)’을 붙인 말이 청소다. 청소는 본래 소(掃)를 행해서 더러움을 씻어내 깨끗하게 만드는 신성한 일이다. 봄을 맞아서 청소하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럽다. 한 해 내내 집 안에 쌓인 온갖 삿된 것들을 정화함으로써 재앙을 막고, 봄의 분출하는 생명력을 불러들임으로써 추위에 움츠렸던 몸을 북돋아 한 해를 건강히, 무사히, 성공적으로 보내고 싶은 것이다.

    정리(整理)는 흐트러진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를 이룩하는 일이다. 모으려면 체계와 분류, 즉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야 하고, 치우려면 쓸모 있음과 없음, 즉 가치를 분별해야 한다. <설문해자>를 쓴 한나라 때 문자학자 허신은 리(理)를 ‘옥(玉)을 다스리다’라고 정의한다. 땅에서 갓 캐낸 옥돌은 투박하고 거칠다. 리(理)는 그 옥을 갈고 닦고 쪼고 문질러서 아름다운 결을 드러내는 장인적 행위로, 보이지 않던 질서(결)를 드러내 보이는 일이다. 나중에 질서란 뜻이 생겼다. 정(整)의 윗부분인 칙(敕)은 나무 다발의 빠져나온 가지들을 쳐내서 가지런히 만드는 행위를 뜻한다. 여기에 ‘바를 정(正)’을 받쳐 ‘어지러운 일을 정돈해 바로잡다’라는 뜻이 되었다.

    정리는 정(整)을 행해 우리 삶에 생겨난 어지러움을 청산하고 옥처럼 아름다운 질서를 드러내는 일이다. 한 해의 일이 시작되는 봄의 첫머리에 흐트러진 삶의 자리를 돌아보면서 정돈부터 하고 싶다는 마음 역시 아주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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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열렬히 살수록, 삶의 변화, 즉 무질서는 피할 수 없다. 운동은 변화를 낳기 때문이다. <철학은 어떻게 정리정돈을 돕는가>에서 독일 철학자 이나 슈미트가 말했듯, “사물들은 우리의 질서 관념에 저항하고, 이죽거리면서 우리가 마련한 틀을 부순다.” 큰 노력을 들여 집을 아름답게 꾸민 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둘러보면 집 안은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다. ‘사용 후 제자리’로 돌리려 주의를 기울여도, 사물들은 책상에서 내려와 침대나 소파 밑에 숨어들고, 서랍에서 튀어나와 사방으로 기어 다니고, 책장에서 넘쳐흘러 방바닥 곳곳에 흩어진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잘 설계된 계획이나 짜놓은 줄거리대로 진행되기보다 우발적 변화와 돌발적 사건에 흔들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무리 애써도 인생도, 사물도 좀처럼 내가 바라는 자리에 놓여 있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인다.

    질서를 잃어버린 삶, 산만하고 엇나간 인생은 쉽게 창조성을 상실한다. 슈미트는 “어질러진 공간은 뜻밖의 손님을 맞을 수 없고 엉클어진 머릿속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들어설 수 없다”라고 말한다. 창조성을 발휘하려면, “방을 자유롭게 숨 쉬고 생각하고 계발하고 휴식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 정돈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흔한 착각과 달리, 인생 정리와 공간 정돈이 반드시 등가를 이루는 것만은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책상은 끔찍하게 어지럽혀 놓았는데 일은 눈부시게 잘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일은 뒤죽박죽 제대로 못 하면서 책상은 늘 깔끔하게 정리해 두는 사람도 있다. 어지러운 공간과 헝클어진 머릿속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에릭 에이브러햄슨 미국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교수는 “주변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일에는 별도의 시간이 드는데, 책상 정리와 생산성은 큰 관계가 없다”라고 말한다. 정리에 쓸 시간을 업무에 집중해서 더 높은 성과를 내는 게 낫다는 말이다.

    특정한 업무 행태를 절대화하는 건 편향에 불과하다. 정해진 시간에 일만 창조적으로 잘하면 되지 도대체 책상 상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잘 정리된 책장에서 눈앞의 책을 못 찾는 이들도 많고, 쌓아둔 문서들에서 필요한 서류를 순식간에 찾아내는 사람도 많다. 겉보기 혼돈이 내면의 카오스를 증언하진 않는다. 책상 정리가 아니라 내면 정리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청소와 정리가 쓸데없단 말은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정리 정돈은 절대로 필요하다. 주어진 공간은 비좁기 그지없고, 타고난 두뇌엔 한계가 있고, 살아갈 시간에는 반드시 종말이 있다. 책상에는 물건을 무한정 쌓아둘 수 없고, 두뇌는 보고 들은 바를 모조리 기억할 수 없고, 하루에 할 일은 무한할 수 없다. 강박적 축적이 물건의 잦은 분실을 낳고, 망각 없는 기억이 질 나쁜 사유로 이어지듯이, 관계와 사건의 무한 범람은 결국 인생 전체를 난장판으로 만든다.

    난장을 고대 히브리어로 토후바보후(tohuwabohu)라고 한다. 이 말은 ‘시급히 질서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 엄청난 혼란’을 뜻한다. 루터는 토후바보후를 ‘황량하고 공허한’ 세상을 뜻할 때 사용했다. 본질(신)을 잃어버린 삶, 지도를 상실한 인생도 여기 속할 것이다. 난장판이 된 삶은 인간을 불행과 허무의 늪에 떨어뜨린다.

    청소와 정리는 자신을 돌보는 강력한 실천이다. 흔히, 청소를 하면서 우리는 인생을 연주하는 추억 놀이로 빠진다. 많은 물건에는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 있다. 물건을 정리해서 버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스러지는 아쉬움과 기억 한 조각이 소멸하는 섬뜩함이 찾아드는 이유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자 떠나보낼 물건과 애틋한 대화를 반복하다 보면 정리도 제대로 못 한 채 하루가 순간이다.

    친숙한 사물과의 대화는 흩어진 생각을 가지런히 하고 어긋난 삶을 바로잡을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무질서의 냇물을 체치고 무의미의 옥돌을 내려쳐 삶의 순금 부분을 끄집어낸다. 청소와 정리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 전체가 난장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세계의 혼돈에 굴하지 않고 내 삶의 의미를 다시 기운다. 청소와 정리는 말끔한 책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 서사를 다시 쓰려고 행하는 일이다. 이 봄이 가기 전에 창문을 활짝 열고 대청소를 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보는 깊은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싶다.

    [장은수 문학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9호 (2022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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