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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우크라이나 사태가 클래식 음악계에 미친 여파 ‘러시아 보이콧’의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
입력 : 2022.03.31 16: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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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1세기에 벌어진 가장 충격적인 참화 가운데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클래식 음악계에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러시아는 위대한 작곡가와 연주가를 다수 배출한 유수의 ‘클래식 음악 강국’이고, 최근까지도 수많은 러시아 출신 음악가들이 세계 각지의 공연장을 누비며 각광받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조국이 돌이킬 수 없는 참사를 일으킨 지금, 러시아 음악가들의 국제적 위상과 활동은 중대 기로에 놓여 있다. 전 세계 각계각층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러시아 보이콧’ 열풍이 음악계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퇴출된 차르, 잠적한 프리마돈나 러시아 보이콧과 관련하여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먼저 화제에 오른 인물은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총감독 겸 음악감독인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평소 푸틴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로 유명하다. 2013년 푸틴의 세 번째 대선 출마 당시 TV에 출연하여 지지 연설을 했고, 2014년 크림반도 합병 때는 문화예술계 인사 19명과 함께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가 ‘러시아 음악계의 차르’로 군림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로운 오페라 극장과 콘서트홀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푸틴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많다. 그런 푸틴과의 인연 때문인지 게르기예프는 이번 사태 발발 이후 ‘반전 메시지’를 내달라는 각계의 요구에 침묵으로 일관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당초 게르기예프는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진행될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미국 투어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첫 공연 직전에 전쟁이 터졌고, 빗발치는 비판 여론에 카네기홀과 빈 필은 공연 전날 게르기예프와 협연자 데니스 마추예프(피아니스트)의 하차를 발표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음악감독인 캐나다 지휘자 야닉 네제 세갠과 베를린에서 콜을 받고 7시간 만에 비행기를 탄 우리나라의 조성진이 그들을 대신했다.
안나 네트렙코
실제로 공연계 일각에서는 러시아 작곡가의 음악을 배제하려는 듯한 움직임도 없지 않다. 독일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최근 공연에서 차이콥스키의 <슬라브 행진곡>을 <교향곡 제1번>으로 교체했고, 영국 카디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을 공연 프로그램에서 제외했다. 다만 두 곡 공히 러시아가 연관된 역사적 사건(전쟁)을 다룬 작품으로 현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두 악단을 포함한 대다수 오케스트라들은 올 시즌 프로그램에 포함된 러시아 음악을 예정대로 연주하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차이콥스키나 라흐마니노프를 들을 수 없는 공연장은 아무래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게르기예프나 네트렙코에 대한 우리의 반응 내지 대응은 정당한 것일까? 글쎄, 돌이켜 보면 이번에 그들이 (우리 쪽의) 공분을 사게 된 이유는 그 태도가 그들의 예술 이면에 자리한 진의를 의심하게 만든 탓이다. 음악이 청중에게 전달될 때 연주가는 대개 작품이나 작곡가, 또는 청중의 내력이나 경험 뒤로 물러나거나 숨는다. 연주가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작품과 작곡가, 청중을 위해서 봉사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연주가도 사람인 이상 음악에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투영하게 마련이고, 그것은 청중에게 탐지되거나 들켰을 때 비로소 호응이나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평화가 아니라 폭력을, 자유가 아니라 억압을 환기하거나 옹호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그들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이나 프로코피예프의 오페라는 대체 무슨 의미였는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의심할 만하지 않겠는가? “음악은 음악일 뿐 정치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은 때로 허울이거나 방편에 불과하다.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9호 (2022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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