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오드리 디완 영화 <레벤느망> vs 아니 에르노 소설 <사건> | 사실을 위로하는 두 번의 허구

    입력 : 2022.03.30 16:43:59

  • 겪었지만 말할 수 없는 경험을 가진 사람은 대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일’이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내색할 수 없어서다. 그들은 대개 먼 곳을 바라본다.

    지난 3월 개봉한 <레벤느망>은 이처럼 차가운 무표정에 가까운 정서를 가진 프랑스 영화다. 한 20대 대학원생이 겪은 임신 중절 사건을 시간 순으로 스크린에 전시하면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삶과 변화하지 않는 세상을 서늘하지만 슬프지는 않게 묘사한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있다. 봉준호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202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1등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황금사자상으로 선택하면서 이 작품의 심층에 형언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허락했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고백록 중편소설 <사건>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레벤느망>에는 과연 어떤 비의가 내재되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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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셋, 임신 확인서를 찢다 1963년, 프랑스의 한 대학원 기숙사. 작가를 꿈꾸는 대학원생 ‘안’은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체의 작지 않은 변화를 감지한다. 3주, 4주가 지나도 몸의 안쪽으로부터 매달 들려오던 소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검진용 침대에 누운 안에게 산부인과 의사는 임신을 통보한다. 의사는 명랑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사생아는 늘 예쁘더군요.”

    큰 눈으로 임신 중절을 요구하는 안은 사실 촉망 받는 인재였다.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수재로 불린 안은 졸업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하룻밤의 선택이 그동안 쌓아온 모든 걸 붕괴시키리라고 예상하진 못했다. 그 학생과의 만남은 길지 않았고, 또 미래를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다. 아이 자체가 싫은 것도 아니었다.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언젠가는 자신도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벌써부터 생의 모든 것을 걸어볼 막대한 의지까지 가진 것도 아니었다. 요청하지 않은 임신 확인서가 기숙사로 도착하고 안은 서류를 바로 찢어버린다. 그리고는 결심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이를 지우겠다고. 안은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안의 문제는 임신 중절 시술이 당시 중범죄였다는 점, 그래서 면허 취소를 각오하고 시술을 해줄 의사가 전무했다는 점이었다. 안은 딜레마에 빠진다. 아이를 낳으면 미혼모가 되고, 낳지 않으려면 감옥에 가야 한다. 안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서서히 타자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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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에선 1960년대 낙태 시술자에 대한 법률 사항이 자세하다. 1948년 제정된 법률에 따르면, 임신 중절 시술을 집도한 의사와 임신 중절에 나선 여성은 동시에 처벌받았다고 한다. 임신 중절을 요구하는 안에게 의사는 쏘아붙인다. “그런 요구를 하면 안 돼요. 그 누구에게도.” 친밀했던 친구들은 ‘차라리 자신들은 모르는 게 낫겠다’며 입을 다물고 안에게서 멀어진다. 안은 무언가에 침범당한 자기 신체 속으로 고립된다.

    그 사이, 혼전 임신 여성은 헤프고 타락한 여성이란 편견이 안의 주변에서 작동한다. ‘임신했으니 이제 안전하다’며 스킨십을 시도하는 남성 친구는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다. 안이 겪는 폭력의 풍경은 소설에서 훨씬 가혹하다. 한 남성은, 임신 사실을 조용히 털어놓으며 도움을 구하는 안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하며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아내가 귀가하기까지 섹스할 시간은 충분하다고. 근대 남성들의 내러티브 속에서 임신한 여성은 ‘헤픈 이미지’로 소비됐다고 소설과 영화는 차분하게 말한다.

    ▶천사를 만드는 여자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안은 아이를 ‘직접’ 떼어내기를 결심한다. 소설은 다음처럼 쓴다.

    ‘부모님 댁에서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카디건을 짜기 위해 어느 여름날에 사들였던 뜨개질바늘 한 짝을 가지고 왔다. 두 개의 길고 선명한 파란색 바늘이었다. 달리 할 방법이 없었다. 혼자 해 보기로 결심했다.’(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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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의 내부를 휘저으며 돌아다닐 끔찍한 대바늘은 잘 짜이고 있는 줄로 알았던 자신의 현실로부터 터져나온 불온한 자아를 봉합하겠다는 주인공 안의 결연한 심리로 읽힌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태반을 받아먹으며 자라고 있는 중인 태아를 스스로 제거해서라도 본래의 ‘나’를 되찾겠다는 결심인데, 어렵지 않게 예상되듯이 이 시도는 처절한 실패로 돌아간다.

    낙태를 시도한 실재 여성들의 기막힌 시도가 영화에 스치듯 묘사된다. 안은 지인의 도움으로 불법 시술을 해주는 중년 여성을 결국 만난다. 조건은 400프랑, 그리고 시술 중에 절대로 소리를 지르지 않기. 소독은 철저히 해주겠지만 마취도구 따위는 애초에 없다.

    원작자 아니 에르노는 임신 중절 시술을 하는 이러한 여성의 모습을 소설에 자세히 기록해뒀다. 당대 프랑스인은 그들을 ‘천사를 만드는 여자’로 불렀다고 한다. 원래는 돌보는 아이를 죽게 방치하는 유모를 뜻하는 19세기 프랑스 용어였지만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유아 살해’가 ‘태아 낙태’로 의미가 바뀌었다고 한다. ‘천사를 만드는 여자’에게 건넬 낙태비용 400프랑을 마련하고자 안은 자신이 읽던 책과 아끼던 목걸이를 거리에 내다 판다. ‘왜 이것들을 파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안은 ‘여행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안의 대답은 거짓이 아니다. 안은 자신의 평범했던 정체성을 되찾는 여행을 떠나는 중이다.

    안은 첫 번째 임신 중절 시술에 실패한다.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건 두 번째 시술에 성공한 뒤 안은 시험을 치르고 논문을 준비하는 일상으로 돌아간다. 상영시간 내내 카메라는 안의 얼굴 정면이나 전신 컷을 비추는 대신, 주인공과 1m쯤 거리를 두고 45°쯤 틀어진 각도로 옆얼굴을 부지런히 따라간다. 안의 통증에 동참하라는 듯한 장면 속에서 두 시간 내내 관객의 긴장은 결코 감소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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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 신화의 전복 영화 <레벤느망>은 원작자 아니 에르노가 젊은 시절 겪었던 실화다. 모순을 얼버무린 허구의 사연이 아니란 얘기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아니 에르노는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소설 집필 원칙을 가진 작가로 그의 모든 소설이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실제로 경험했던 임신 중절 기록을 일기체 소설로 고백하면서 여성의 신체에 가해졌던 트라우마를 보여주고 그 경험을 사회 전체에 ‘용해’시키려 시도한다. 오드리 디완 감독이, 2000년에 프랑스 갈리마르에서 출간된 아니 에르노의 소설 <사건>을 약 20년 만에 영화화한 이유도 실제 경험의 트라우마를 겨냥한 애도의 차원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다. 주디스 허먼에 따르면 누군가를 애도하고 또 치유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서사적 기억’이다. 고통 그 자체에 매몰되는 사람은 트라우마에 끝없이 마비(트라우마적 기억)되지만 고통을 겪은 사람이 기억하고 애도하고 그 기억을 세계와 연결(서사적 기억)하려 할 때 트라우마는 치유될 가능성을 얻는다. 소설가 아니 에르노와 오드리 디완 감독이 소설과 영화에서 해내고 있는 성취는 바로 여성이 겪은 세계에 대한 트라우마의 극복 가능성을 열어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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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가 세계 영화인들에게 호평을 받는 이유는 모성(母性)에 관한 옛 시선을 전복시키는 강력함, 그리고 그 전복에 주어지는 논리적인 당위성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예술에서 모성은 침범이나 훼손이 불가능한 신화로 받들어져 왔다. 태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생명을 베팅하는 모든 엄마들의 선택은 ‘위대한 어머니’라는 신화를 허락받았다. 그러나 <레벤느망>은 태아의 미래가 여성의 현재에 앞선다는 성 역할의 폭력 원칙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영화는 여성의 신체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논의를 이끌어낸다. 임신 중절은 프랑스에서 더 이상 금지된 일이 아니며, 한국에서도 낙태죄는 2021년 1월 1일부로 폐기됐다. (그렇다고 낙태가 한국에서 분명한 합법이라고 표현하기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어쨌든 임신을 둘러싸고 지켜져야 했던 모성 신화가 더 이상 여성의 신체 자기결정권에 앞서지 못함을 전 사회가 동의하기 시작했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선전과 구호의 차원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대신 오직 담담하게 또 차분한 어조로, 1960년대 프랑스의 한 여성이 겪어야만 했던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보편적 통증을 풀어내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간접 경험자의 렌즈를 쓰고 이 세상의 절반을 이루는 여성들이 비슷하게 고민했던 바로 그 ‘사건들’의 목격자로 올라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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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설을 위로하다 한 가지 더. 이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지만 두 결과물엔 차이점이 여럿 발견된다. 소설 마지막 부분의 한 대목이 특히 그렇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아낸 안에게 의사는 따지듯 묻는다. “왜 이런 짓을 했지? 어떻게 이렇게 했냐고, 대답해!”(66쪽) 의사는 이어 안에게 ‘오텔디유’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오텔디유는 고아와 빈민을 돌보기 위한 병원이다. 함부로 몸을 굴리고 불법으로 낙태 시술을 한 안에게 민간 의료원에 갈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면은 영화에 이르러 다르게 변주된다. 안은 병원에 실려 가기 전 ‘운이 나쁘면 의사가 자신의 증상 원인을 낙태로 기록할 것이고 운이 좋으면 유산으로 기록할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천장이 부옇게 보일 정도로 희미해진 의식 너머로 간호사에게 말하는 의사의 목소리를 안은 듣는다. “유산.” 소설에선 끝까지 외면받던 안이 영화에서 조금은 위로받을 여지를 남겨둔 것은 아닐까.

    영화와 소설에는 이 밖에도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무화(無化) 개념, 문장의 한 부분이 이후에 서술되는 문장의 첫 부분에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뜻하는 아나포라(anaphora) 기법 등 논의가 필요한 여러 이야깃거리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문장과 스크린에 남겨진 이러한 장치들 덕분인지 <레벤느망>과 <사건>은 무수한 사유의 줄기를 잉태 중인 상징과 은유의 전시장처럼 느껴진다. [김유태 매경 문화스포츠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9호 (2022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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