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발트해가 숨겨놓은 예술의 도시 라트비아 리가

    입력 : 2022.03.10 15:33:34

  • 독일 오페라의 거성인 리하르트 바그너, 영화 <전함 포템킨>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감독,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노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등 라트비아와 인연을 맺은 예술가들은 많다. 우리에게도 가수 심수봉이 번안해서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가 라트비아와 관련이 있다. 이 노래는 작곡가 라이온즈 파울스가 라트비아 민요를 바탕으로 만든 ‘마리냐가 준 소녀의 인생’이라는 원곡을 러시아 가수 알라 푸가초바가 불러 유명해졌다. 물론 원곡에 ‘백만 송이 장미’라는 가사는 없고,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는 라트비아의 고난과 역경을 담고 있다. ‘백만 송이 장미’라는 로맨틱한 단어와 상관없이 슬픈 역사를 가진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는 1201년 독일 브레멘 출신의 알베르트 대주교가 십자군을 이끌고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리가를 상업상의 목적으로 결성된 한자동맹에 가입시켜 무역 도시로 성장시켰고,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통합하여 리보니아 공국을 건설하였다. 15세기 이후부터 리가는 ‘동유럽의 파리’, ‘구소련의 라스베이거스’ 등으로 불리며 유흥과 환락의 도시로 유명해졌고, 발트해 이웃 국가인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리가의 보드카 공장이나 담배 공장으로 돈을 벌러 왔을 정도로 도시의 규모가 커졌다.

    사진설명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구시가지와 리가의 옛 영광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돔 성당과 성 피터 교회는 세월을 정면으로 맞서며 오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중에서도 독일인이 지은 돔 성당은 알베르트 대주교의 관저로 사용된 곳이자 발트해에 있는 성당 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독일 출신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이마누엘 칸트도 이 성당을 찾았을 만큼 리가를 대표하는 종교 중심지이다. 무엇보다 성당이 시민들의 영혼의 안식처라면 성당 앞 광장은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아 리가에서 가장 활기찬 분위기와 사람들로 언제나 북새통이다.

    붉은빛을 토해내는 돔 성당을 우측으로 끼고 구시가지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자, 도시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이 123m의 첨탑을 가진 성 피터 교회가 눈앞에 나타난다. 1209년에 건축된 교회와 첨탑은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을 만큼 리가의 전성기를 상징하였다. 첨탑 꼭대기에 오르면 발아래로 다우가바강과 고색창연한 구시가지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아마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첨탑 전망대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거나 청운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강물이 더 큰 바다로 흘러가듯이 자신의 꿈을 이 전망대에서 키운 사람이 바로 리가 출신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이다. 1985년 <백야>와 1987년 <지젤> 등 몇 편의 영화로도 우리에게 친숙한 바리시니코프는 9세 때 발레를 시작했고, 16세 때 레닌그라드(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 학교에 입학하며 세계적인 발레리노로 발돋움했다. 1969년 청년 바리시니코프는 러시아 최고의 발레단 중 하나인 키로프발레단에 들어가 솔리스트로서 명성을 얻었고, 26세가 되던 1974년 자신의 미래를 위해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후 ‘뉴욕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수석 무용수로 활약하면서 세계적인 발레리노이자 배우로서 성공했고, 2017년 고향을 떠난 지 30여 년 만에 국적이 회복돼 리가에서 진행된 여러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최근에는 라트비아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남자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작품으로 호평을 받았다.
    사진설명
    돔 성당과 성 피터 교회를 등지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경계로 한 발짝 옮기면 중세풍의 건축물과 19세기부터 건축된 아르누보 건축물이 앙상블을 이뤄 리가만의 독특한 건축 예술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도 전통적인 중세 건축양식이 아닌 말 그대로 ‘새로운 예술’인 아르누보 양식으로 건물을 지은 대표적인 건축가가 바로 <전함 포템킨>을 연출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아버지인 미하일 예이젠시테인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아르누보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일부 유럽 지역에서만 유행한 건축양식이다. 건물 외벽에 담쟁이를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나 이미지가 강한 동물, 신화에 등장하는 신과 님프 등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아르누보 건물들의 박물관과도 같은 거리와 골목길을 걷고 있노라면, 저 멀리서 하늘 위로 날 것만 같은 소년 바리시니코프의 멋진 춤사위가 신기루처럼 보이고, 드디어 리가가 숨겨놓은 진정한 보석인 라트비아 국립오페라극장이 눈앞에 나타난다. 운하 옆에 세워진 국립오페라극장은 1782년에 리가 독일극장(혹은 시민극장)으로 출발했고, 1863년 현재의 극장으로 이전하면서 ‘라트비아 국립오페라극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극장 내부는 ‘백악관’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화려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극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제정 러시아와 구소련 시대 때 오페라, 발레, 오케스트라 등 수준 높은 공연이 열린 곳으로 유명하다. 리가 출신의 바리시니코프도 이곳에서 공연했고, 독일 출신의 리하르트 바그너가 음악감독으로 2년 동안 활동했던 곳이다.

    <로엔그린>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등으로 유명한 바그너는 사랑하는 아내 민나 플래너와 함께 1837년부터 1839년까지 리가에서 살았다. 이들은 1836년 11월 26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렸지만, 바그너의 사치와 많은 빚 때문에 독일을 떠나야만 했다. 바그너 부부가 선택한 여행지는 리가였고, 그때 마침 리가 독일극장으로부터 음악감독이자 관현악단 지휘자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바그너가 처음 도착했을 때 이곳의 음악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무엇보다 리가 독일극장은 오페라극장으로 사용하기엔 규모도 작았고, 고작 이탈리아나 독일 오페라단의 공연 몇 차례가 전부였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모차르트, 베토벤, 로시니 등 5개의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공연을 무대에 올리면서 리가를 발트해에서 가장 수준 높은 음악의 도시로 발전시켰고, 자신의 첫 번째 오페라인 <리엔치(Rienzi)>와 캐럴 <소나무야(Oh, Tannenbaum)>을 작곡하였다.
    영화 <백야> 포스터(1985년)
    영화 <백야> 포스터(1985년)
    리가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지만, 정작 바그너는 리가에서 2년간 머물며 작품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바그너와 4세 연상의 연극배우 민나와의 부부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빚쟁이로부터 도망치듯 독일을 떠난 것도 모자라 바그너의 질투심과 소유욕이 강한 성격 때문에 큰소리로 싸우는 일이 많았다. 이보다 더한 것은 바그너의 사치 때문에 빚이 점점 더 늘어갔다. 결국 바그너가 리가에 있다는 소문이 빚쟁이들에게 알려지자 바그너 부부는 프랑스 파리로 떠나야만 했다.

    비록 바그너가 리가에 머물렀을 땐 국립오페라극장은 없었지만, 그의 음악적 열정과 자양분은 고스란히 남았다. 어쩌면 바그너가 리가에 남긴 예술에 대한 유산이 라이온즈 파울스, 예이젠시테인 감독,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등 세계적인 예술가가 나올 수 있게 된 문화예술의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리가는 예술의 변방 도시가 아닌 발트해에서 가장 예술적인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8호 (2022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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