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준모의 미술동네 톺아보기] 고흐의 자화상展, 상찬과 비난 사이

    입력 : 2022.03.04 17:09:36

  • 코로나19로 일상이 정지된 것 같은 지금, 고흐(1853~1890)의 전시가 런던의 코톨드 미술관(Courtauld Gallery)에서 열렸다. 미술사에 빛나는 작품들을 모아 놓은 이 미술관은 미술사학들의 꿈의 공간이자 학교다. 미술관은 공간 재구조화를 위해 2018년 문을 닫고 3년여의 공사를 진행했다. 지난해 11월 재개관 이후 첫 전시로 고흐의 자화상전(Van Gogh Self-Portraits, ~5월 8일)을 개최 중이다. 반 고흐는 평생, 평생이라야 37년 남짓, 27세에 그림을 시작했으니 화가로 산 세월은 고작 10년에 불과하다. 그는 이 짧은 기간에 불꽃처럼 자신을 태워 860점의 유화를 포함해 약 2100점의 작품을 남겼다. 35~40점의 자화상은 특히 더 유명하다. 그가 남긴 자화상 수가 오락가락하는 것은 자화상에 대한 개념이 미술사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자화상 중 16점이 출품되어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내면을 탐구했던 열기로 전시장이 후끈거릴 정도라고 한다. 고흐의 자화상은 이 전시를 위해 고흐미술관,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시카고미술관, 미국 국립미술관, 오슬로 국립미술관, 크뢸러 뮐러미술관과 개인 소장가로부터 모아왔다. 고흐의 작품 대여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큐레이터인 필자는 전시보다 고흐의 자화상을 16점이나 모을 수 있는 코톨드의 예술적 외교력이 더 놀랍다.

    코톨드가 재개관 첫 전시로 고흐의 자화상을 내세운 건 아마도 고흐의 자화상 중 가장 유명한 <귀에 붕대를 맨 자화상>(1889)을 소장하고 있고, 마침 코로나19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반 가택 연금 상태인 사람들에게 이 기회에 자아를 성찰하라는 권유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그의 35점에 이르는 자화상은 약 4년 동안 집중적으로 제작됐다. 자화상은 파리 시절(1886년 3월~1888년 2월)에 많이 그려 22점이나 된다. 1880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 입문한 고흐는 거의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고, 처음 약 4년간은 드로잉과 수채화에만 전념했다.
    고흐의 자화상 8점
    고흐의 자화상 8점
    1882년 처음 유화를 접한 그는 1886년 파리로 나왔고 이곳에서 로트렉과 고갱, 그리고 화상인 동생 테오의 소개로 피사로, 쇠라를 만났다. 파리 시절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그림에 눈을 떠갔다. 1887년 9월에 시작해 10월경에 완성한 그의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은 학습기의 전통적 화풍에서 벗어나 소위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인 소용돌이치듯 휘몰아가는 격정적인 생명을 상기시키는 붓 터치를 시도한다. 이후 아를(1888년 2월~1889년 4월)과 셍 레미(1889년 5월~1890년 4월)에서도 자화상과 자신을 통한 인간 탐구는 쉼이 없었다. 그리고 오베르(1890년 5~7월)에 이르러 삶을 내려놓는다. 그럼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자화상에 매달렸을까. 고흐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자연에 대한 탐구나 아름다움에 대한 경의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탐구였다. 하지만 자신의 경계성 성격 장애와 조울증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그와 어울리기를 주저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거의 독방에 혼자인 채였다. 그래서 고흐는 자신이 유일한 모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의 자화상 속 뻗쳐 올라간 머리카락이 보여주듯 그는 매우 강렬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높은 자존감이 그에게 자화상을 그리도록 했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그에게 자화상은 그의 자서전과 다름없다. 고흐는 변화무쌍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편지에 “한 사람의 초상이라도 다양하게 그려질 수 있다”고 썼다. 이는 대상인 사람도 언제나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고흐의 자화상을 살펴보면 그 또한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면도한 깔끔한 모습, 수염이 덥수룩한 것, 단정하게 자른 짧은 머리도 있고 때로는 볼이 홀쭉하거나, 얼굴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것도 있다. 하지만 자화상들이 각기 다른 이유는 그의 기분이 매우 격렬하게 흔들렸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도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또 독주인 압상트를 즐겼던 그는 술을 마셨을 때와 마시지 않았을 때가 달랐다. 또 색과 촉감, 터치와 스트로크,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방식, 마음의 상태는 그의 자화상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독창적인 작품이 되도록 하는 힘이었다. 결국 그의 자화상은 각기 “시간의 장막과 상황의 운명이 한순간에 찢겨진 것 같은” 드문 순간이 한 방에 모여 관객들의 눈앞에 ‘현현(顯現)’한다. 130년이 지난 지금, 한 방에 모인 16명의 고흐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번 전시의 절정은 1889년 그의 생애 마지막을 보낸 생 레미의 병원에서 그린 3점의 자화상이 나란히 걸린 것이다. 창백하고 떨리는 듯 보이는 귀 자른 후의 자화상에 비해 생 레미에서 그린 첫 자화상은 어둡지만, 얼굴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듯 빛난다. ‘내가 일어난 첫날’부터 ‘마른 악마처럼 창백한’ 모습이지만 다시 붓과 팔레트를 들고 이젤 앞에 선 그의 모습은 그리려는 의지가 살려는 의지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세 번째 자화상은 매우 깔끔한 정장을 한 모습이다. 마치 그의 마지막을 예고하듯.

    사진설명
    고흐는 렘브란트에게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기록하고 탐구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하지만 이는 고흐의 고통스러운 삶과 상처를 너무 낭만적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 고흐에 정통한 미술사학자 베일리(Martin Bailey)는 핀란드의 여성 화가 헬레네 세르프벡(Helene Schjerfbeck, 1862~1946)과 비교하며 그의 자화상을 ‘높은 자존감’의 표현인 동시에 ‘인간탐구’라 보았다. 전시를 큐레이팅한 세레스(Karen Serres)도 이번 전시는 고흐 전시지만 블록버스터가 아닌 작은 규모로 진행했다. 고흐의 새로운 발견 즉 ‘감정의 표현’보다 ‘화가로서의 성장 과정’,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 기법의 변화를 타임라인에 따라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뒀다. 마치 ‘낭만’과 ‘비애’의 감옥에 갇혀 있던 고흐를 석방해 작가로서 그를 다시 평가할 기회를 준 셈이다. 특히 자화상을 실험도구로 선택한 점, 인간의 자신에 대한 심리적 성찰과 내적, 외적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보는’ 전시가 아닌 ‘생각’하는 전시로 만들어 주었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고흐에 대한 거품을 빼고 화가로서 고흐를 드러낸 전시는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이런 호평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위해 제작 판매한 기념품에서 동티가 났다. 1만원이 안 되는 귀 모양의 지우개는 귀 자른 고흐를 떠올리게 했고, ‘푹신한 거품을 즐기는 고문당한 예술가’에게 이상적이라는 문구와 함께 판매되는 해바라기 비누, ‘우정, 사랑, 성, 일, 그리고 자아 등 20가지 주요 심리적 상황에 현명한 조언을 해줄 상자’라는 설명이 첨부된 응급처치용 구급대는 고흐의 지병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유머라 넘어갈 수도 있지만, 정신병력의 ‘고흐 인지감수성’이 부족한 마케팅이란 비난이 일었다. 결과적으로 슬그머니 미술관 숍 홈페이지에서 상품은 내렸지만, 미술관이 얄팍하고 무감각했다는 지적과 ‘너무 나갔다’는 비판은 여전하다. 부자 몸조심하라는 말, 다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정준모 미술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8호 (2022년 3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