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세르반테스와 콜럼버스의 흔적이 스민 스페인 살라망카
입력 : 2022.01.28 14:40:56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 서쪽으로 200㎞, 포르투갈 국경에서 동쪽으로 80㎞ 떨어져 있는 살라망카는 스페인에서 가장 중요한 대학도시이자 세계문화유산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처럼 주민의 약 50%가 대학생인 만큼 살라망카는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넘쳐나고, 마요르 광장, 콘차스 저택, 대성당, 살라망카 대학 등 고색창연한 건축물이 고풍스러운 중세시대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무엇보다 도시의 이름은 잘 몰라도 흑돼지(이베리코) 뒷다리를 말린 ‘하몽’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 하몽의 고향이 바로 살라망카이다.
살라망카 대성당
역사적·예술적·문화적·학문적 자부심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구시가지로 한 발짝 들어가면 88개의 아치와 247개의 발코니가 인상적인 마요르 광장에 이르게 된다. 건축가 알베르토 추리게라가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한 마요르 광장은 1729~1756년에 완성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약 100여 년 동안 투우장으로 사용됐다. 가로·세로 각각 70m 크기의 네모난 광장은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마요르 광장보다 작지만, 살라망카의 심장이자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이다. 다양한 시대에 걸쳐 잊지 못할 순간들을 보낸 추억의 장소이자 시민들의 삶의 궤적과 함께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88개의 아치에는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 카를로스 1세, 알폰소 11세, 페르난도 6세, 산타 테레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스페인의 역대 국왕 등 스페인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들의 얼굴이 장식돼 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좁은 골목길들은 구시가지의 중심이자 시민들의 마음의 안식처인 대성당으로 이어진다. 아스라한 옛 영광을 오롯이 품고 있는 대성당은 마요르 광장과 또 다른 느낌의 중세 건축물이다. 대개 유럽의 구시가지에는 한 개의 대성당이 있지만, 살라망카에는 두 개의 대성당이 나란히 붙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12세기에 건축된 비에하(Vieja, ‘오래된’이란 뜻) 대성당과 18세기에 완공된 누에바(Nueva, ‘새로운’이란 뜻) 대성당 두 개가 한 개의 성당처럼 이어져 있다. 15세기 이후 살라망카 대학이 유럽에서 큰 인기를 누리면서 갑작스럽게 늘어난 인구로 인해 공간이 부족해지자 그 옆에 새로운 대성당을 증축하게 된 것이다. 흔히 낡고 오래된 성당을 부수고 그 위에 훨씬 큰 규모로 대성당을 짓는데, 살라망카는 그렇게 하지 않고 새로운 성당을 지어 서로를 연결하였다. 그래서 비에하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없고, 반드시 새롭게 증축된 대성당을 통과해야만 유서 깊은 대성당을 오롯이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의 종교적 문화를 경험했다면 이 도시가 자랑하는 상아탑의 전당이자 살라망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살라망카 대학과 마주하게 된다. 1218년 알폰소 9세는 자신의 왕국을 수준 높은 학문과 문화예술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스페인 최초로 살라망카 대학을 설립했다. 1134년 대성당 소속의 작은 규모로 시작한 대학이지만 알폰소 9세 때 유럽 최초로 ‘대학(University)’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1936년 스페인 내전 이후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 요람이었다.
8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살라망카 대학은 스페인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인 프라이 루이스 데 레온,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 스페인어에 관한 최초의 문법서를 저술한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 여왕의 가정교사였던 베아트리체 갈린도 등 스페인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또한 스페인 문학의 거성인 세르반테스가 살라망카 대학에서 잠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스페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 <유리 학사> 같은 작품을 통해 “살라망카의 평화로움 속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곳에 다시 돌아오길 원한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 도시를 사랑했다. 물론 세르반테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가 구체적으로 살라망카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했는지 정확하게 밝혀내진 못하였다. 살라망카 대학의 동문 홈페이지에도 “세르반테스가 이 학교의 학위를 받았다는 문헌적 근거를 찾지 못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학자 대부분은 세르반테스 작품에서 ‘살라망카의 학사’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이 도시에서 살아야만 알 수 있는 경험을 작품에 담아냈기에 그가 살라망카 대학에서 청강생으로 공부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요르 광장
세르반테스와 비교해 문헌적 기록이 좀 더 확실한 사람은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열네 살 때 살라망카 대학 법학과를 다녔던 아즈텍왕국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이다. 이 중에서도 1487년 포르투갈의 주앙 2세를 설득하지 못한 콜럼버스는 아시아로 가는 서쪽 항로 개척에 대해 살라망카 대학에서 설명회를 열었다. 그럼 어떤 이유로 콜럼버스는 살라망카 대학에서 자신의 사업계획을 설명하게 된 것일까?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오기 3년 전인 1484년 주왕 2세에게 신대륙 발견과 관련해 세 가지 조건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첫째 기사와 제독 작위를 줄 것, 둘째 신대륙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를 줄 것, 셋째 신대륙에서 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을 달라는 것이다. 이와 똑같이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과 그의 남편 페르디난트 2세에게 청원하였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2세는 콜럼버스의 요청이 무례하고 말이 안 된다고 느꼈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로 가겠다는 그의 항해 기술도 믿지 못했다. 그래서 페르디난트 2세는 콜럼버스에게 살라망카 대학 지리학자 위원회에 참석해 인도로 가는 항로에 대한 계획을 검증받으라고 명령했다.
콜럼버스의 설득
아쉽게도 지리학자들은 콜럼버스의 항로 계획이 비현실적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미지의 세계로 전파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쳐 이사벨 여왕으로부터 승낙을 받아냈다. 그 결과 1492년 8월 3일 이탈리아인·스페인인·영국인·유대인 등 88명의 선원과 3척의 배는 세비야의 팔로스(Palos)항을 출발했다. 콜럼버스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리학자들의 말처럼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지 못했고, 1504년까지 총 네 번 걸쳐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렇지만 스페인에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직선의 아메리카 항로가 개척되면서 살라망카 대학 출신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남아메리카를 정복해 많은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또한 이 항로를 통해 아메리카의 토마토·감자·옥수수·담배·코코아 등의 작물이 유럽으로 전해졌고, 유럽에서는 남미로 커피와 선진 문명이 들어갔다.
이처럼 살라망카는 우리에게 조금은 낯선 도시지만, 돼지고기 하몽,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살라망카 대학, 시민들의 영혼을 품어주는 대성당과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마요르 광장 등 살라망카를 눈부시게 아름다운 중세의 도시로 빛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