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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남프랑스 여행의 꽃’ 니스를 사랑한 앙리 마티스
입력 : 2021.10.28 14:4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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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해군함대의 기지인 툴롱에서 칸, 앙티브, 니스, 에즈, 모나코 등을 거쳐 이탈리아 국경과 가까운 망통까지(약 40㎞) 이어진 지중해 해안을 ‘코트다쥐르(Cote d’Azur)’라고 부른다. 프랑스어로 코트는 ‘해안’을, 아쥐르는 ‘푸른 해변’을 뜻하는데, 이 지명은 스테판 리에기어드가 1887년 12월에 출간한 <라 코트다쥐르>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 해 7000만 명의 세계 여행자들이 프랑스 파리로 몰려든다면, 세계 부자들은 남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트다쥐르를 찾는다. 우리에게는 낯선 도시들이지만, 국제영화제로 유명한 칸, 파블로 피카소가 1951년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렸던 발로리스,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가 여생을 보낸 카뉴 쉬르 메르,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감을 얻은 에즈 쉬르 메르, 마르크 샤갈과 앙리 마티스의 보석 같은 작품이 탄생한 니스 등. 이처럼 예술가들이 너무나 사랑한 남프랑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안만큼이나 그들을 매혹한 무언가가 있는 영감의 도시임이 틀림없다. 독특한 이름만큼이나 자연의 시혜를 흠뻑 품은 코트다쥐르에서 중심 도시이자 세계적인 휴양 도시로 명성을 날리는 곳은 단연 니스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에서 도시의 이름이 유래했고, 1864년 기차가 개통되면서 니스로 외국인 거주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그중에서도 지중해의 맑고 부드러운 햇살을 만끽하기 위해 온 영국인이 많았다. 영국의 귀족과 부유층들은 겨울철이면 비가 자주 내리고 음침한 런던 날씨를 피해 일 년 내내 따뜻하고 쾌청한 니스를 마치 파라다이스처럼 여겼다. 이런 이유로 1882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니스를 처음 방문했고, 1895년부터 1899년까지 매년 시미즈 언덕에 있는 레지나 호텔에서 온화한 겨울을 마음껏 누렸다. 이 외에도 유럽 왕족과 귀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더 2세는 개인 전용 열차를 타고 니스로 왔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벨기에의 왕들도 니스를 즐겨 찾았다.
미술관에서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니스의 낭만과 감성을 채웠다면, 이 도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롬나드 데 장글레’라는 거리를 걸어볼 차례이다. ‘영국인의 산책로’라는 뜻의 프롬나드 데 장글레는 19세기에 영국인이 지중해와 자갈 해변을 따라 약 3㎞ 남짓 조성한 것이다. 활 모양처럼 굽어진 영국인의 산책로는 니스를 찾는 여행자이든 예술가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한 번쯤 걷게 되는 랜드마크이자 낭만의 거리이다. 1918년 이탈리아 출신의 모딜리아니가 심리학자인 폴 기욤과 이 거리를 산책하며 함께 촬영한 몇 장의 흑백 사진은 니스 여행을 열망했던 모딜리아니 팬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장소가 됐다. 특히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는 프롬나드 데 장글레와 지중해가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 방에서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햇빛 그리고 바다 등을 캔버스에 열정적으로 담아냈다. 그는 니스 출신은 아니지만 40대 중반인 1916년에 처음으로 이 도시를 찾았고, 40여 년 동안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만들어냈다.
수많은 예술가 중에서 앙리 마티스는 무슨 이유로 파리가 아닌 니스를 사무치게 사랑했을까? 사실 그가 코트다쥐르에 처음 온 이유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하게 앓고 있던 기관지염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주치의의 소개로 공기가 안 좋은 파리보다 에메랄드빛의 바다와 맑은 공기가 일품인 남프랑스를 찾았다. 코트다쥐르 도시 중에서 마티스는 이탈리아와 인접한 망통에 머물렀지만, 1917년 우연히 니스에 들렀다가 정착했다. 그리고 1954년까지 머물며 오달리스크와 색종이 콜라주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겨 ‘니스의 예술가’라는 별칭도 얻었다.
앙리 마티스
1926년 니스를 떠나지 않기로 하면서 마티스는 샤를 펠릭스 광장 1번지에 월세 아파트를 얻은 후 파리에서 살던 가족을 이곳으로 데려왔다. 10여 년 동안 니스에서 평온한 삶을 이어온 마티스는 19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죽기 전 5년 동안 겨울을 보냈던 레지나 호텔에 화가로서의 마지막 아틀리에를 꾸려 자신이 가진 모든 예술적 영혼을 불살랐다.
빨강, 초록, 파랑 등 보색을 이용해 강렬한 색채로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마티스는 인간의 본성과 예술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니스 구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마티스 미술관’에서 느낄 수 있다. 마티스와 가족 그리고 국가에서 기증한 그림과 구아슈 68점, 드로잉 236점, 판화 218점, 사진 95점, 조각품 57점, 마티스가 그린 책 14점 등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미술관 옆 노트르담 수도원 유적지 안에 그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천천히 마티스의 작품을 감상하며 미술관 내부를 걷다 보면 20대 초반 법률가의 꿈을 포기하고 화가를 꿈꾸었던 그의 말이 생각난다.
“내 손이 작은 물감 상자를 받아 든 그 순간, 나는 이것이 나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천국을 발견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완벽하게 자유롭고 온전히 혼자였으며 평화로웠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4호 (2021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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