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은수의 인문학 산책] 오징어 게임, 좀비 그리고 느린 사랑

    입력 : 2021.10.28 14:39:27

  • 누구나 ‘조용한 시절’을 꿈꾼다. 안락하고 평온하며 화목하고 순탄한 하루하루를 바란다. 아등바등하지 않고, 좌고우면하지 않고, 전전반측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다. 그러나 세계는 무정하고, 자연은 무심하다. 인간 마음 따위는 아랑곳없다. 코로나19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을 습격했듯이, “어느 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이성복,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행복은 억지로, 힘겹게 이룩해 나가는 것이지만, 불행은 한순간 우리를 찾아온다. 격변하는 세상은 애타고 순간순간 숨 막히는 긴장과 근심 속으로 나날이 우리를 몰아넣는다. 그리하여 시인들은 삶의 언어를 흔히 고통의 언어로 표현한다. ‘애정지둔(愛情遲鈍)’에서 김수영은 말한다. “조용한 시절 대신/ 나의 백골(白骨)이 생기었다”.

    시인에게 나날은 “첩첩이 무서운 주야(晝夜)”이고, “생활은 열도(熱度)를 측량할 수 없는 일”이다. 단단하고 안전한 삶은 모조리 녹아서 사라지고, 나에게 남은 것은 고작 백골뿐이다. 그야말로 “생활무한(生活無限)/ 고난돌기(苦難突起)/ 백골의복(白骨衣服)/ 삼복염천거래(三伏炎天去來)”로 이루어진 열여덟 자 ‘절망의 주문’이 절로 쏟아질 지경이다.

    고단한 삶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고난은 한없이 돌출하고, 백골처럼 간신히 숨만 붙어 헐떡이는데, 삼복더위는 가차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마음이 기댈 곳은 오직 사랑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애정지둔(愛情遲鈍)이어서 사랑은 느리고 무디게 온다. 김수영은 사자성어 말놀이를 통해서 현대인의 실존을 환기한다.

    누구나 이 세상을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살지 못하고 삐걱거리는 백골로 살고 있다.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시인은 비록 사랑이 느리지만 언젠가 오리라 믿으면서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사랑은 도대체 언제 오는가. 생활의 열도는 더욱더 높아지고 생활의 어려움은 한층 더 깊어져, 세상은 <오징어 게임> 속 무인도나 다름없다. 네가 없어져야 내가 사는, 아니 너를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지옥불 속에 모두가 갇혀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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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대부분이 잔혹한 죽음이 전시되는 이 게임에 열광하는 것이야말로 인성을 상실한 무참한 비극이다. 부자들이 유희로 구획한 섬에 갇힌 채 인간은 한낱 검투사로 전락하고, 특히 여성은 몸을 팔아서라도 살길을 찾는 창녀로 타락한다. 우애와 협동을 다지는 전통 놀이는 낱낱이 해체되어 돈을 겨루는 도박 게임으로 변한다. 이래도 괜찮은지를 묻는 윤리적 질문은 사라지고, 넷플릭스의 ‘돈 세는 소리’에 감탄하는 환성과 ‘돈 버는데 딴지 그만’을 외치는 목소리만 드높다. 그러나 ‘일확천금’ 생존 게임에서 대박이 난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게임을 만들고 주관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456억원을 투자해 남몰래 4조5600억원을 벌어들이는 중이다. 로또를 맞은 것은 아파트 당첨자가 아니라 대장동 사업의 검은 설계자들이듯이 말이다.

    인기가 곧 명작의 조건은 아니다. 일찍이 <트루먼쇼>는 스크린 장막을 찢어서 트루먼을 탈출시키고, <매트릭스>는 빨간 알약을 통해 세계의 진실을 알려준다. 스펙터클 쇼의 뒤에 씁쓸히라도 있어야 할 한 줌의 도덕이 명작을 만든다. 세상이 좀 더 무서운 지옥으로 변한 탓인지, <오징어 게임>에서 우리는 펼쳐진 생지옥 자체를 탈출할 모색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추억의 형태로만 사랑이 존재하는 완벽한 절망의 드라마이고, 이 세계 속에서 타인이 정한 대로 좀비로 살 수밖에 없음을 긍정하게 만드는 한낱 오락에 불과하다. 숱한 판타지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좀비가 우리 현대인의 진짜 정체성이다. 좀비는 ‘살아 있는 시체’를 뜻한다. 드라마 <킹덤>이 보여 주듯, 좀비는 인간의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인간은 아닌 존재로, 언어를 잃고 짐승처럼 으르렁대면서 타자의 피를 탐하며 살아간다. 타자의 죽음을 통해 생존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이들은 <오징어 게임> 속 참가자들과 다르지 않다. 좀비(zombie)는 본래 서아프리카에서 온 말로, ‘뱀의 신’을 뜻한다. 콩고어에서 ‘주술 대상’을 의미하는 줌비(zumbi), 킴분두어에서 ‘신’을 의미하는 은잠비(nzambi)가 어원이다. 새로운 몸으로 갈아탄 후 허물을 남기는 뱀은 죽음의 굴레를 이기는 생명의 상징이다. 그러나 서양 식민주의자들이 강요한 노예제 아래에서 이 불사의 존재는 부두교 의식을 거쳐 신성을 잃은 채 단지 ‘되살아난 시체’를 뜻하게 되었다.

    스스로 노예이자 흔히 노예 농장의 운영자였던 부두교 사제는 좀비를 의지와 지성을 빼앗긴 채 노예 노동을 지속하는 존재로 묘사했다. 좀비가 되면 영혼이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 안식할 수 없었으므로 노예들은 좀비를 두려워했다. 살아서는 좀비처럼 살더라도, 죽어서는 자유를 되찾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때문에 좀비는 가혹한 노동을 못 견딘 노예들이 극단적 선택을 택하지 못하게 방지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타율적 노예 노동을 자율적 노예 노동으로 바꾼 것이 인간 관리와 자기 계발로 집약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 행동 전체가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서 감시되고 제어되고 관리되는 사회에서 과로로 죽을 때까지 자신을 계발하고 착취하면서 산다. 철학자들은 이런 사회 양태를 감시 사회(푸코), 통제 사회(들뢰즈), 피로 사회(한병철) 등으로 부르면서 ‘인간 좀비화 현상’에 대해서 경고한다. 우리는 지금 인간 전체가 좀비가 되는 ‘인간 종말 게임’을 치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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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문학 평론가 하쿠타 나오야의 <좀비 사회학>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좀비 사회다. 현대인은 좀비로 살아가나, 자신이 좀비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발 느리고 지능 낮고 썩은 몸에 이성 없는 존재로 인간과 공존 불가능했던 20세기 좀비와 달리, 21세기 좀비들은 지능이 높고 멀쩡하게 생겼으며 인간처럼 살아간다. 두 존재의 유일한 차이는 감염이다. 20세기 좀비가 피를 갈구하면서 수동적으로 인간을 공격한다면, 21세기 좀비는 “통제당한다는 자각 없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면서 스스로 감염체를 퍼뜨린다. 영화 <부산행>의 좀비가 20세기 좀비라면,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참여자는 사실상 21세기 좀비나 다름없다. <부산행>의 괴물-좀비를 만든 감염원이 바이러스라면, <오징어 게임>의 ‘인간형 좀비’를 만든 감염원은 돈이다. 둘의 공통점이라면 생존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서사를 확산한다는 점이다. 하쿠타는 현대 대중문화를 통해 퍼져 가는 좀비 포맷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통치하기 위한 장치”라고 말한다. 좀비는 우리가 좀비로 살고 있음을 환기하는 동시에 좀비로 사는 것에 익숙하게 설득하는 장치라는 뜻이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좀비물 아닌 좀비물에서 우리는 돈 탓에 자유를 반납한 채 목숨 걸고 좀비화하는 우리 자신의 불쌍한 얼굴을 순간순간 확인한다. 우리의 고뇌, 우리의 애씀, 우리의 잔꾀, 우리의 분노, 우리의 열정이 모두 상금으로 환전되는 현실이자 비극에 경악한다. 70년 전 김수영은 “나의 노래는 물방울처럼 땅속으로 향하여 들어갈 것”이라면서 시의 물방울로 사랑의 싹을 틔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시인이 꿈꾸었던 ‘느리고 더딘 사랑’은 아직 우리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생존을 강요하고 사랑을 증발시키는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시인은 무덤까지 노래를 보냄으로써 죽음의 존재인 백골이 사랑을 누리는 존재로 변화하기를 바랐으나, 갈수록 가열 차게 부는 생존의 열풍은 우리의 살을 녹이고 뼈를 부식하는 중이다.

    오늘날 우리는 삶의 규칙을 자율로 이룩하고 스스로 거기에 맞추어 사는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 타인의 규칙을 추종하는 스켈레톤 병사처럼 살아간다. “생활무한(生活無限)/ 고난돌기(苦難突起)/ 백골의복(白骨衣服)/ 삼복염천거래(三伏炎天去來)”의 무덤에서 우리를 일으켜 줄 노래는 언제 들려올까. 애정지둔, 느리고 더디게 오는 사랑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장은수 문학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4호 (2021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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