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21) 냉전과 분열 그리고 통합의 시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그 이후… 동독 사람들의 애환 그린 `굿바이 레닌`

    입력 : 2021.09.30 15:42:42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이 패전국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분단국가’라는 새로운 국가 형태가 나타났다. ‘분단국가’는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지만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의해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통치 기관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국과 독일, 베트남 등 이들 분단국가는 ‘냉전시대의 비극’이라 일컬어졌고, 독일을 제외한 한국과 베트남에서는 남북 간에 참혹한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이들 세 나라 가운데 베트남은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남북이 통일되었고, 독일은 1990년 구동독(독일민주공화국)이 해체되면서 구서독(독일연방공화국)에 병합하는 형태로 독일의 재통일이 완성됐다.

    볼프강 베커 감독의 <굿바이 레닌>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부터 통일이 이루어진 1990년까지 그 당시 통일 독일을 바라보는 동독 사람들의 미묘한 시선과 입장을 블랙 코미디로 풀어낸 영화이다. 2003년 베를린영화제 최우수 유럽영화상을 수상한 <굿바이 레닌>은 같은 분단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여전히 분단이 지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면에서 시사점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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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舊)동독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굿바이 레닌> 공산당원인 크리스티아네는 서독으로 망명한 남편 때문에 역설적으로 당에 더욱 매진하는 열성당원이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 철거 시위대에 참여한 아들 알렉스를 발견하곤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알렉스는 자기 탓에 어머니가 쓰러졌다며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8개월 뒤 크리스티아네가 기적적으로 깨어나지만, 동독은 그 사이에 서독에 흡수통일되어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충격을 받으면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알렉스는 어머니를 위해 예전에 사용했던 동독 유리잔과 이불 커튼 등을 꺼내고 새로 장만한 서독 물건을 감추는 등 옛 동독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주변을 꾸민다.

    하지만 통일 이후 밀려든 자본주의 물결 앞에 동독의 제품은 대부분 사라져버렸기에 알렉스는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동독 시절에 사용했던 식료품 통, 음료수 통 등을 찾아낸다. 급기야는 동독이 서독을 흡수한 것처럼 거짓 뉴스를 제작해 어머니에게 보여주기까지 한다. 영화는 이 시기에 박탈감을 느낀 동독 주민들을 보여주며 통일로 인해 이들이 겪은 상실감과 애환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영화 속에서 알렉스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을 보고 이웃 사람은 “서독 놈들이 우릴 모두 거지로 만들었다”며 허탈해 한다. 또한 이케아가구와 BMW, 코카콜라, 벤츠의 광고판 등 서독의 브랜드로 가득 찬 동독 거리가 비춰지고 동독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어요” “이젠 TV 발레 프로그램이 없어졌어요”라며 박탈감을 드러내는 장면이 다수 등장한다.

    이처럼 동독의 붕괴와 함께 동독 제품들도 하루아침에 시장을 잃었다. 1990년 7월에 있었던 화폐통합으로 동독 주민은 서독 마르크화를 갖게 됐고 이 돈으로 그동안 열망했던 지멘스와 BMW, 벤츠 등 서독 제품을 구입했다. 시장에는 서독 제품들이 넘쳐났으며, 그러는 사이 동독 기업들은 도산하거나 서독 기업들에 팔렸다. 화폐통합으로 동독 기업들은 산업 경쟁력을 잃었고 동독지역의 실업률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하지만 더 어려운 문제는 그들 머릿속에 남아있는 장벽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오시(Ossi·동독 놈)’와 ‘베시(Wessi·서독 놈)’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늘 불평만 하는 동독인이라는 뜻의 ‘동독 투덜이들(Jammer-Ossi)’이라는 말과 ‘잘난 척하는 서독 놈(Besser-Wessi)’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영화에서도 서독인인 알렉스의 매형이 “동독인들은 만족을 몰라, 늘 불평불만이지”라며 알렉스에게 짜증내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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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실수와 오보, 군중심리가 촉발시킨 독일 통일 통일 후 경제적, 사회적으로 혼란이 컸던 배경에는 독일의 통일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측면도 있었다. 1980년대 슈미트 서독 총리와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 서로 방문하여 통일의 전기가 마련되고, 소련의 개방과 개혁 정책으로 동구권 국가들이 민주화를 추진하는 분위기였지만 동서독 정부가 바로 통일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동독 정부는 단지 거센 민주화 요구 시위 속에서 여행 허가를 통해 시위를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에서 귄터 샤보프스키 대변인이 ‘즉시’ 여행이 가능하다고 잘못 발표하고 그 내용을 동독 정부가 베를린 장벽을 즉시 철거한다고 잘못 알아들은 이탈리아 기자의 기사가 삽시간에 전 세계를 돌았고 수많은 군중이 베를린 장벽에 모여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샤보프스키의 말실수와 언론의 오보, 군중심리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하룻밤 사이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슈타지의 청사는 시민들의 습격으로 파괴당하는 등 동독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해 하루 약 2000명의 동독 주민이 서쪽으로 넘어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예상치 못한 이러한 과정에 많은 독일 인접국은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을 경계하면서 독일 통일 논의를 서둘러 종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1990년 3월, 동독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유선거를 실시했고 신속한 통일을 원하는 동독 주민과 서독의 외교 노력으로 동독지역의 5개 주가 서독인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급하게 통일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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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직후 저성장… 막대한 투자 덕에 결국 부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흥분이 사라지자 동독의 절망적인 경제 상황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됐다. 처음 몇 년 동안은 동독지역에서 공장이 연일 폐쇄되고 실업률이 엄청나게 늘었으며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시장이 붕괴하는 등 많은 악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막대한 통일비용에 따른 부담으로 1990년대 말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하며 ‘유럽의 병자’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러나 동독에 쏟아부은 투자가 헛되지는 않았다. 동독지역의 생활수준은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기대 수명이나 주거, 교육, 의료 서비스와 같은 사회 지표와 각종 경제 지표에서 모든 수치가 개선됐다. 독일 통일 25주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구서독인의 51%, 구동독인의 67%가 통일이 이익이 됐다고 답변했으며, 불이익이었다는 반응은 양쪽 모두 17%로 낮게 나왔다. 또한 갤럽이 미국, 유럽 연합, 독일, 러시아, 중국의 리더십을 진단하고자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실시한 세계 지도력 평가에서 독일은 2017년 이래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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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동독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나는 2등 시민” 하지만 여전히 남은 숙제도 있다. 물질적으로 동독지역의 삶의 질이 큰 폭으로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소득과 평균재산은 여전히 격차가 많이 나고 상대적인 박탈감이 높아졌다. 또한 동독지역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통일의 한 주역이었던 동독인은 정체성이 사라졌다.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동독 주민들이 즐겨봤던 TV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그들이 불렀던 노랫소리가 사라졌다. 그들이 좋아하던 스포츠 팀도 해체되고 다니던 직장도 문을 닫았다. 서독의 경제력에 의해 모든 것이 서독 식으로 바뀌면서 동독인들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변화를 강요받게 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알렉스 가족은 어머니가 숨겨놓은 동독 마르크를 늦게 찾는 바람에 서독 마르크로 교환하지 못하고 빈털터리가 되다시피 한다. 그날 밤 알렉스는 동독 지폐들을 건물 옥상에서 찢어버리며 “우리가 40년 동안 썼던 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구동독 주민들은 아직도 그들을 스스로 ‘2등 시민’으로 여기는 감정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앙겔라 메르켈 전총리가 독일 통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평가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러한 모습은 구서독에서 구동독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어 막대한 통일비용을 썼지만 재정지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구동독인들이 느끼는 이러한 박탈감은 2015년 대규모 난민 수용 이후 극우당의 성장이라는 부정적인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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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소원은 통일?… 사회통합 고려돼야 현재 40~50대 이상의 중장년층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 문구처럼 통일은 지상과제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젊은 층은 이들과 상당한 온도 차를 보이고 있다. 2020년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만 18~20세 청년은 ‘분단 유지(46.7%)’가 ‘남북통일(40.5%)’보다 더 많은 응답을 기록했다. 천문학적 통일비용 부담 때문이다. 그 엄청난 비용을 앞으로 젊은 세대가 어떻게 감당하겠느냐는 것이다. 통일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한민족이 통일 국가를 이루는 것은 당연하며 남북한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통일비용이 많이 들긴 하지만, 경제적 이득 또한 장기적으로 더 많다는 점을 든다. 매년 지출되는 군사비가 절감되고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뀜으로써 2년이란 기간의 기회비용이 생기며 아시아 유럽으로 통하는 물류중심 국가로서 위상을 높일 수 있고 넓은 영토와 인구 증대로 내수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사례에서 보듯 통일문제를 다룸에 있어 경제적인 측면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가 사회통합이다. 설령 제도적 통일을 이뤄 경제수준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남북 주민 간에 불신이 생기고 북쪽 출신 주민들의 소외감이 높아진다면 치유가 쉽지 않은 사회적 갈등을 낳을 우려가 있다. 더구나 한국은 독일과는 달리 6·25전쟁이란 엄청난 비극을 겪었기 때문에 남북 주민들 간에 증오가 남아 있기도 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한 집단들도 존재해왔다.

    이렇게 볼 때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통일도 중요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가치가 남한과 북한지역의 사회적 통합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이 평화롭게 공생하며 서로 윈윈하는 것이다. 통합은 ‘과정’이고 통일은 ‘결과물’이다.



    ‘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는 이번 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이미영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3호 (2021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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