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 2개의 식당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첫 번째 식당은 40년이 넘은 곳으로 지금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아저씨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설립하신 노포 식당이다. 식당 주인은 주방에서 어깨 너머로 집안의 비법을 배웠고 고객층도 두텁다. 옆에 있는 두 번째 식당은 최근에 오픈한 식당이다. 이 집의 요리사는 팔도를 돌아다니며 재료를 익히고 경험을 쌓은 후 고향에 돌아와 식당을 차렸다. 아직은 손님이 많지 않지만 한 번 다녀간 손님들은 대부분 좋은 평가를 한다. 사람들은 어떤 식당에 먼저 눈길이 갈까?
첫 번째 식당은 프랑스 와이너리의 상황과 비슷하다. 프랑스의 양조가들은 조상 대대로 와인을 만들어 왔고, 과학의 도움도 받고 있으나 어려운 상황에서는 대대로 전해온 비법에 따른다. 이 와인들은 오랫동안 전 세계 애호가들에 의해 품질을 인정받았으나 창의적인 후계자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두 번째 식당의 처지는 신대륙 와인의 그것과 비슷하다. 부족한 노하우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창의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 종종 뛰어난 와인들이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의 검증을 받지 못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최고의 와인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사디 패밀리’는 두 번째 식당의 상황과 잘 맞아 떨어진다. 이곳의 와인 메이커이자 주인인 에븐 사디(Eben Sadie)는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등 세계 곳곳의 서로 다른 양조장에서 경험을 쌓고 고향에 돌아와 1999년 지금의 양조장을 설립하였다. 자기의 이름으로 첫 번째 와인을 만들었을 때에는 심지어 자신의 양조장도 갖고 있지 못해 자신이 일하던 스파이스 라우트의 설비를 빌려야 했다.
사디 패밀리 와인 셀러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처음 희망봉에 도착한 것은 1488년으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보다 몇 년 빠르다. 이후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이곳을 식민지 개척의 전초기지로 개발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와인의 역사는 이와 동시에 시작됐다. 이 역시 다른 신대륙 와인의 역사와 비교하면 매우 빠른 편이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와인들은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전문가와 몇몇 와인 애호가들은 ‘방드 콘스탄스’와 같은 스위트 와인이나 1990년대 미국 시장에서 유행했던 ‘피노타주’ 등을 기억한다.
나는 이것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보졸레 누보의 가벼운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진지한 보졸레 와인 생산자가 어려움을 겪는 것과 비슷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는 그보다 더 다양하고 좋은 와인들이 생산된다. 이곳의 유명 와이너리 중 하나인 미어러스트의 ‘루비콘’ 같은 와인들은 눈을 가리고 시음을 하면 보르도 고급 와인들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콜루멜라
에븐 사디의 새로운 와인들은 기존의 남아공 와인과 비교하여 3가지의 다른 점이 있었다. 첫째, 그는 고향의 포도 재배 환경이 스페인이나 프랑스 남부와 같은 지중해 지역과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이곳에서 유행하는 피노타주나 카베르네 소비뇽이 아닌, 시라와 무르베드르, 비오니에 같은 지중해 포도를 재배하였다. 둘째, 에븐 사디는 블렌딩을 통해 최대한 복잡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단 하나의 포도로는 고향이 가진 복잡한 테루아를 표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48개의 서로 다른 포도밭에서 포도를 재배하고 있으며 이웃으로부터 포도를 사올 때도 최대한 다양한 종류의 포도를 사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에븐 사디의 철학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최고의 와인이 아닌 세계 최고의 와인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텔레비전도 보지 않고 신문도 보지 않는 괴짜 양조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샤토 하이야스’나 ‘프랑수와 하브노’ 같은 세계적인 와인들을 자주 시음하는 매우 탐구적인 와인 메이커로, 종종 자신이 만든 와인만 마시는 보수적인 유럽의 양조가들과는 매우 다르다.
‘사디 패밀리 팔라디우스(Sadie Family Palladius)’는 그러나 슈블랑, 비오니에, 마르산 등 ‘지중해 포도’로 불리는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다. 여기에 슈냉 블랑이라는 프랑스의 추운 지역에서 주로 재배하는 포도를 추가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몇 년이 지나도 좀처럼 열리지 않는, 프랑스 남부의 고급 화이트 와인들에 비해 팔라디우스는 마시기 편하다. 그렇다고 해서 팔라디우스가 가벼운 와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매우 짙은 산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 와인의 깊고 풍부한 향기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몇 년간의 셀러링과 충분한 디캔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