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입력 : 2021.09.01 10:39:38
서양 음악사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하이든, 모차르트, 살리에리,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등 수많은 음악가가 전성기를 보냈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중세풍의 고색창연한 이 도시를 아름다운 선율로 물들인 음악이 있어 빈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커피 한 잔과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이것은 우리에게 생경한 모습이지만, 실제로 빈에서 볼 수 있는 아침 풍경이다. 도나우강 상류 연안에 자리한 빈은 유럽의 고도 가운데 하나이자 유럽에서 가장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탄생한 도시이다.
그럼 빈은 언제부터 음악가들에게 사랑받는 도시이자 음악의 도시로 명성을 날렸을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빈의 음악적 자양분은 영원한 제국을 꿈꿨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예술적 지원과 수준 높은 안목이 낳은 결과이다. 특히 1740년 10월 20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되었고, 자신이 좋아했던 음악 분야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유럽에서 강력한 세력을 자랑할 때 그녀는 쇤부른 궁전으로 훌륭한 음악가들을 초청해 많은 연주회를 즐겼다고 한다. 특히 1762년 10월 여섯 살의 모차르트는 황제의 초청을 받아 쇤부른 궁전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멋지게 연주하였다. 환상적인 공연을 감상한 황제는 모차르트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칭찬도 해주고, 왕자가 입었던 멋진 의복까지 어린 소년에게 선물하였다. 지금도 모차르트가 연주했던 거울의 방에 들어서면 그를 둘러싼 귀족들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바라보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처럼 빈은 음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음악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한 편의 오케스트라가 공연되는 멋진 무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18세기를 지나 한스 리히터,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20세기 빈 필하모닉을 중심으로 새로운 음악가들이 과거의 영화로움을 이어갔다. 또한 20세기 전후로 빈은 음악뿐만 아니라 1897년 구스타프 클림트가 주축이 된 빈 분리파의 등장으로 ‘화가의 도시’로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빈의 음악적 토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집중적인 투자와 후원으로 발전했지만, 그렇다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음악 분야에만 집중적으로 지원한 것은 아니다. 대개 유럽의 궁정 문화가 발달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러시아제국의 로마노프 왕가처럼 합스부르크 왕가도 그 당시 유럽에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면서 오늘날 ‘빈 미술사 박물관’을 탄생시켰다. 그 결과 부르봉 왕가의 루브르 박물관, 로마노프 왕가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있는 것처럼 합스부르크 왕가의 컬렉션은 빈 미술사 박물관이 대표한다. 1891년 요제프 1세 때 건축된 빈 미술사 박물관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미술관 중 하나로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회화 및 수집품을 전시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오스트리아와 빈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빈을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열정과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빈의 남역 부근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으로 가야 한다. 현재 오스트리아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은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 <유디트Ⅰ>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등과 에곤 실레의 <죽음과 소녀> <포옹> <오스카 코코슈카> 등이 전시돼 있다.
이 중에서도 1907년에 그려진 <키스>는 클림트의 대표작이자 이 미술관의 얼굴과도 같은 작품이다. 카페와 레스토랑 벽에 걸리는 1순위 작품으로도 유명한 <키스>는 황금색의 옷을 입은 남녀가 포옹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클림트의 대표작을 마주하는 순간, 주마등처럼 그의 삶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클림트와 에밀리
56세까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클림트는 <키스>에 등장하는 주인공보다 더 아름답고 로맨틱한 사랑을 했던 희대의 바람둥이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죽자마자 14명의 사생아가 어머니를 대신해 친자 소송을 벌였을 만큼 그는 수많은 여자와 사랑을 나누며 에로티시즘의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화려하고 로맨틱한 그림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실제 생활은 크리스마스 때 집 안에 빵 한 조각이 없었을 정도로 가난했고 고독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물감과 캔버스를 제때 살 수 없을 만큼 극빈한 삶을 살았지만, 2006년 클림트의 작품 중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초상>이 에스티 로더 그룹의 로널드 로더 회장에게 최고가인 1억3500달러에 판매되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클림트가 살아 있을 때 한 작품이라도 높은 가격에 팔렸다면 매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를 여러 사람과 즐겁게 보냈을 것이다.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 2층에 걸린 <키스>를 한참 동안 바라다보면 ‘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 단서는 클림트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에밀리를 불러주오”라고 말한 데서 찾을 수 있다. 29세 때 클림트는 17세의 사돈처녀인 에밀리 플뢰게를 처음 만났다. 패션 디자이너였던 그녀는 단박에 클림트의 모델이 되었고, 이 둘은 급격하게 친해졌다. 그림과 패션이라는 예술적 테두리 안에서 이들은 평생 정신적 동반자로 아껴주고 이해해주는 사이로 발전했다. 훗날 클림트가 죽고 나서 모든 장례를 에밀리가 치러주었고, 클림트의 사생아도 꼼꼼히 챙겨주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키스>의 주인공이 바로 에밀리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에 의해 <키스>의 주인공은 에밀리가 아닌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라는 주장이 새롭게 등장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는 오스트리아 빈 은행 연합감독의 딸로 설탕 제조업으로 성공한 페르디난트 블로흐 바우어와 결혼을 했다. 이때 클림트 작품을 좋아했던 페르디난트가 클림트에게 아내의 초상화를 부탁하면서 이들의 만남이 이뤄졌다. 그런데 클림트가 아델레 부인을 그릴 때는 오른손을 자세히 그리지 않았는데, <키스>를 자세히 보면 여자가 남자의 목을 잡은 오른손이 제대로 펴지 않은 상태로 그렸다. 또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초상> 작품에서도 왼손이 오른손을 감싸고 있어 무언가를 숨기려는 클림트의 의도를 짐작게 했다. 사실 클림트가 이렇게 그린 이유는 아델레 부인이 어릴 적에 오른손을 다쳐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키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점에 주목해 아델레 부인이 이 작품의 실제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키스>의 주인공이 에밀리이든 아니면 아델레 부인이든 우리에게는 클림트의 명작을 볼 수 있어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은 의미 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들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사랑과 이별 등 다양한 삶이 녹아 있기에 빈은 우리에게 남다른 여행지가 된다. 예술가들이 거닐었던 길, 그들이 커피를 마셨던 카페, 그들이 사랑을 나눴던 레스토랑 등 예술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빈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여행지로 마음 깊이 남을 것이다.
[이태훈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