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와 ‘바다’ 인상주의… 음악의 걸작들이 펼쳐 보이는 이야기
입력 : 2021.08.31 14:59:33
플루트가 은근한 어조로 한 줄기 선율을 꺼내놓는다. 그것은 몽롱한 기운을 가득 머금고 있다. 그 소리를 따라서 그는 마치 주술에라도 걸린 듯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 곧이어 산들바람처럼 살랑이는 하프의 탄주가 그의 귓가를 간질이고,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호른의 울림이 그의 의식을 감싼다. 시나브로 목신(牧神) 판의 달콤한 환상이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이 독창적인 관현악곡은 프랑스 근대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1862~1918)의 이름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후배 작곡가이자 저명한 지휘자였던 피에르 불레즈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시가 보들레르의 시 안에서 확고하게 그 뿌리를 내린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음악은 이 곡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고 해도 좋다. 그 첫 음에서부터 음악은 완전히 새로운 맥박으로 뛰기 시작한다.”
<목신의 오후> 발레 공연 포스터
드뷔시는 이 곡에서 ‘연속적인 장면들을 통해 한낮의 열기 속에서 펼쳐지는 목신의 욕망과 꿈’을 그리고자 했다. 그 이야기 속에서 그리스 신화의 목신 판(Pan, 프랑스어로 Faune)은 샘가에서 목욕하는 님프의 나신을 탐닉하고 나아가 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를 품에 안는다. 하지만 판은 그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할 수 없다. 심지어 그가 잠에서 깨어 어제 오후의 일을 회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이렇듯 몽환적이고도 관능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 드뷔시는 음계, 화성, 리듬, 음색, 구성 등을 흐릿하게 만들고 부드럽게 흐르도록 했다. 그 결과로 마치 모네의 그림처럼 모호하고 쇠라의 그림처럼 세밀한 한 폭의 음악적 풍경화가 탄생했다. 그리고 그 후로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인상주의 음악’이라 부르게 되었다.
▶음악의 인상주의 혹은 상징주의
드뷔시는 마치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상을 독자적 시선으로 파악하여 그 변화하는 성질에 대한 인상을 자유로운 필치로 표현했다. 그런데 정작 드뷔시 자신은 ‘인상주의 음악’이라는 호칭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이 차라리 비합리성, 환상, 상상력의 창조적 힘을 중요시하는 상징주의 시인들의 그것에 가깝다고 여겼다. 실제로 그는 베를렌, 보들레르, 말레르메의 시들에 곡을 붙이기도 했고, 음 그 자체의 의미보다는 자신이 배열한 음들이 불러일으키는 감각과 환영을 중시했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에 길들여진 귀에 드뷔시의 음악은 난해하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드뷔시 음악은 다분히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다. 따라서 그저 듣고, 즐기고, 나름대로 음미하면 그걸로 족하다. 다만 고전·낭만 시대에 통용되던 음악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19세기 유럽 음악의 관습적 어법에 회의를 품었던 드뷔시는 선율, 화성, 형식의 고전적 지주를 흩트려 놓았고, 그럼으로써 음악에 보다 다양한 색채와 폭넓은 자유를 부여했다. 그런 드뷔시 음악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온음음계’ ‘선법적 선율’ ‘병행 화음’ 등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감상자 입장에서는 이론적 설명보다 표본이 될 만한 작품을 몇 곡 들어보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대표작 <인상, 일출>
드뷔시는 역사상 가장 탁월한 피아노 음악 작곡가 중 한 명이기도 한데, 그의 피아노곡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달빛(Clair de Lune)’은 무척 매혹적이긴 하지만 초창기 작품이라서 드뷔시 음악의 특성을 충분히 나타내지는 못한다. 보다 본격적인 입문을 원한다면 <판화(Estampes)>부터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탑’ ‘그라나다의 황혼’ ‘비 내리는 정원’의 세 곡으로 이루어진 이 이국적인 피아노 소품집은 드뷔시의 주요 관심사와 개성적 어법을 가지런히 펼쳐놓은 듯하다. 관현악곡 중에도 비슷한 모양새의 곡이 있는데, 바로 <3개의 야상곡(Trois Nocturnes)>이라는 제목의 모음곡이다. 그 첫 곡인 ‘구름’은 드뷔시 음악의 즉흥성과 비정형성이라는 면을, 두 번째 곡 ‘축제’는 화려한 색채와 현란한 리듬의 향연이라는 면을, 신비로운 여성합창이 가세하는 세 번째 곡 ‘바다의 요정(사이렌)’은 도취적 환상에의 탐닉이라는 면을 각각 선명하게 부각하고 있다.
▶회화적 음악에 투영된 인생의 여정
이제 드뷔시 음악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면 최고의 걸작을 만나볼 차례이다. 1905년에 발표된 <바다(La mer)>는 <목신의 오후>(1894),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1902)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의 대표작이다. ‘3개의 교향적 스케치’라는 부제가 붙은 이 대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단계적으로 변모하는 바다의 풍경에 대한 음악적 묘사의 성격을 지닌다. 즉, 제1곡 ‘바다 위의 새벽부터 정오까지’는 마치 어둡고 조용한 새벽의 해변에서 출발하여, 어느덧 수평선 위로 해가 솟아올라 바다를 비추다가 마침내 중천에 자리하는 과정을 그려 보이는 듯하고, 제2곡 ‘파도의 유희’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다의 물결과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 그 다채롭고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연상시키며, 제3곡 ‘바람과 바다와의 대화’는 때론 거칠게, 때론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응답하는 바다의 격랑과 잔물결, 그리고 그 망망대해를 꿋꿋이 헤쳐 나가는 한 척의 배를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본질적으로 음악 작품이기에 이런 지나친 회화적 묘사의 강조나 맹신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예의 표제들을 염두에 두고 곰곰이 귀를 기울이다 보면 이것 역시 ‘인간의 음악’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다. 그렇다면 이 곡의 시간적 흐름을 인생의 여정에 빗댈 수도 있지 않을까?
드뷔시에게 영감을 준 일본 판화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바다>를 쓰던 무렵은 드뷔시의 생애에서 중대한 전환기였다. 일단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통해서 자신만의 양식과 어법을 확립한 직후로, 당시 그는 창작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기 위해서 고심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부상한 것이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바다의 이미지였다. 부르고뉴의 처갓집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언덕들을 바라보며 유년기에 자신을 매혹했던 칸의 바다를 떠올렸는데, 칸은 그가 피아노를 처음 배움으로써 음악의 길로 들어선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작곡이 진행되는 동안 첫 번째 아내 릴리 텍시에를 버리고 부유한 엠마 바르닥과 재혼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릴리는 자살미수 소동까지 일으켰고, 어느덧 저명인사가 된 드뷔시는 세인들의 지탄을 받았다. 이후 그는 엠마와 함께 노르망디의 저지(Jersey)섬과 디에프(Dieppe)를 여행하며 작업을 이어갔고, 종국에는 영불해협에 면한 휴양지 이스트본(Eastbourne)에서 작품을 마무리 지었다. 그동안 엠마의 배 속에서는 그의 딸이 자라고 있었다.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