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종억의 골프 소묘시초(素描詩抄)] 나의 골프 시절

    입력 : 2025.12.26 15:33:13

  • 서울컨츄리에서의 라이사장과 선친 라용균, 홍덕산 프로
    서울컨츄리에서의 라이사장과 선친 라용균, 홍덕산 프로

    나의 선친 라용균(羅容均, 전국회 부의장)께서는 생전에 골프를 지극히 사랑하신 분이었다. 선친에게 골프는 단순한 취미나 사교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내와 절제, 예의와 품격을 몸으로 익히는 하나의 수양(修養)이었고, 나아가 우리 사회에 반드시 뿌리내려야 할 근대 스포츠 문화라고 믿었던 가치였다. 선친은 한국 사회에 골프가 정착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사람을 잇고 기록을 바로 세우는 일에 힘을 기울이셨다.

    한국 골프사의 상징적 인물인 연덕춘(延德春) 프로와 선친의 인연도 그러한 맥락 속에 있다. 연덕춘은 1934년 일본 가나가와현 후지사와 골프클럽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유학 생활을 시작했고, 이듬해 일본 관동골프 연맹에서 한국인 최초로 프로 자격을 취득했다. 1936년 잠시 귀국해 경성골프구락부(현 서울 뚝섬 일대) 전속 프로로 활동하던 그는, 1941년 5월 요코하마 호도가야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일본 오픈 골프선수권대회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우승은 일본식 이름 ‘이토 데루하루’로만 기록되었고, 정작 그의 본명 ‘연덕춘’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선친은 일본에 거류 중이던 연덕춘을 국내 골프계와 연결하며, 일본 오픈 우승자 명부에 한국 이름을 바로 세우는데 앞장섰다. 문화·체육계는 물론 정치권과도 소통하며 사실을 바로잡는 데 힘썼고, 이는 한 개인의 명예 회복을 넘어 한국 골프사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기록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역사가 된다. 선친은 그 단순하지만 무거운 진리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

    우리나라 골프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1890년대 후반 함경도 원산 외국인 거류지에 영국인 상시 직원들이 조성한 6홀 코스가 그 시작이다.

    이후 1921년 효창공원 9홀 코스를 거쳐, 1929년 군자리 18홀 코스의 경성골프구락부가 만들어졌고, 광복 이후에는 서울컨트리클럽으로 재정비되며 국제 규격의 골프장으로 자리잡았다. 이 모든 흐름 속에서 한국 골프는 단절과 계승을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고등학생 시절 어느 날, 국회 부의장 관용차를 타고 선친을 마중 나가 서울컨트리클럽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선친은 18번 홀 마지막 티샷을 앞두고 계셨다. 해질녘 낙조 속에서 붉은 태양을 향해 빨려 들어가듯 날아가던 그 드라이브 샷은, 감수성 많던 소년의 가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과 충격을 남겼다. 그 장면은 훗날 내가 골프를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대학 2학년이던 1968년, 현재 아내인 이채영 여사의 부친 이민우(당시 신진자동차 경영인)의 권유로 서울컨트리클럽 홍덕산 헤드프로에게 개인 지도를 받게 되었다. 태권도 5단이던 나는 비교적 빠르게 골프에 적응했고, 석 달 만에 9홀 내기에서 점수를 주고받을 만큼 실력이 늘었다. 하루 수백 번의 벙커샷, 100야드 이내 어프로치 연습에 몰두하며 골프는 곧 나의 일상이 되었다.

    라이사장의 골프입문 사진
    라이사장의 골프입문 사진

    1970년대 초, 기업인 자녀들의 모임인 두루회에 가입해 골프를 즐겼지만, 사회생활과 유학, 결혼으로 한동안 클럽을 내려놓아야 했다. 마흔을 넘겨 다시 골프를 시작했을 때, 잊힌 줄 알았던 감각은 놀랍도록 빠르게 되살아났다. 각종 대회에서 우승하며 티칭 프로와 정식 프로 자격을 취득했고, 에이지 슛 63타 세계기록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후 세계 골프 100대 선정위원 겸 아시아권 심사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골프장을 직접 누볐다. 아시아 골프장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브루나이 골프클럽이다. 황금으로 장식된 호텔 겸 클럽하우스, 완벽에 가까운 배수와 잔디 관리 속에서 첫날 이븐파 72타를 기록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좋은 골프장은 시설이 아니라 사람으로 완성된다. 골프는 신사의 운동이다. 아무리 훌륭한 코스라도 캐디 교육이 부족하고 동반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그날의 라운드는 쉽게 무너진다. 수많은 에피소드와 희로애락 속에서 내가 남긴 가장 소중한 흔적은 ‘골프 소묘시초(素描詩抄)’다. 골프장마다의 풍향과 자연의 기운, 그날의 감회를 시(詩)로 남겼고, 프레지스턴밸리CC에서는 나의 골프 시가 바위에 새겨지거나 로비에 걸리기도 했다. 물론 사전 허락 없이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그만큼 골프와 시가 하나로 공감된 순간이었으리라 믿는다.

    세계 각국의 볼 마크
    세계 각국의 볼 마크

    이제 남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풀기로 한다. 골프는 기술의 우열을 겨루는 운동이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이다. 독자 여러분 모두가 건강과 함께 골프를 오래 즐기시길, 그리고 스코어보다 즐길 줄 아는 마음을 간직하시길 바라는 뜻으로 이 글을 맺는다.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통일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문화 진작을 통한 국격 향상과 통일 기반 조성을 실천해왔다. 핸디(O)의 골프 실력자다. 아시아 100대코스 선정위원장과 대한프로골프협회(KPGA)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한민국 골프문화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