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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한국의 고택] 아산 맹씨행단 | 청빈한 재상이 살던 소박한 집
입력 : 2025.09.24 14:4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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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맹씨행단 전경 맹씨행단은 조선 초기 명재상 맹사성의 집이다. 맹씨행단은 고려 말 최영(崔瑩) 장군이 살았던 집이었으나, 맹사성이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되면서 물려받은 집이다. 맹사성의 조부인 맹유(孟裕)는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인물로 최영과 친분이 두터워 손자인 맹사성을 최영의 손녀와 혼인시켰다.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몰락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맹유는 서두문동(西杜門洞)에 피난했다가 순절하고, 맹사성의 아버지 맹희도(孟希道)는 동두문동(東杜門洞)에 숨었다가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현재의 맹씨행단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살았다.
고불(古弗) 맹사성(孟思誠, 1360~1438년)은 고려 우왕 12년(1386년)에 이색(李穡)이 시험관인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실시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춘추관 검열을 거쳐 중앙의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의 구신(舊臣) 계열이었던 맹사성은 수원판관과 면천현감 등 외직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에 부친 맹희도(孟希道)는 조선 건국 이후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한산으로 피신해 있다가 아들 맹사성의 장래를 위해 신 왕조에서 잠시 외직을 맡기도 하고 정도전, 권근 등 조선의 실세와 접촉하기도 하였다. 덕분에 맹사성은 중앙의 경직(京職)으로 복귀하였다. 맹사성은 자식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소신을 잠시나마 굽혔던 부친 맹희도에게 효도로 보답하였다.
맹씨행단의 창호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는 ‘思誠孝感(사성효감)’이라는 제목으로 맹사성의 효성에 대해 수록하고 있다. 맹사성은 10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7일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애통해했으며, 장례가 끝나자 여막을 짓고 읍혈(泣血·눈물을 흘리며 슬퍼함)하여 계단에 풀이 자라지 못하였다. 묘 앞에 잣나무를 심었는데 하루는 산돼지가 잣나무를 받아서 잣나무가 말라 죽어 버렸다. 이를 본 맹사성이 통곡하니 그 다음날 잣나무를 들이받았던 산돼지가 호랑이에게 잡혀죽어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사람들은 맹사성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감탄하였다. 정종 연간에 정문(旌門·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해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받았다. 맹사성의 부친인 맹희도도 태조 연간에 정문을 받았기 때문에 부자가 모두가 정문을 받은 드문 경우이다.
맹씨행단에 자리한 사당 맹사성은 겸양지덕(謙讓之德)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러나 맹사성이 처음부터 겸손했던 것은 아니다. 장원급제하여 지방관이 되었을 때는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무명 선사를 찾아가 고을에서 최고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스님은 “착한 일을 많이 하시면 됩니다”라고 답하였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에 맹사성은 “아니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이런 말을 들으려고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라며 버럭 화를 내며 일어섰다. 그때 스님이 차를 한잔하고 가라고 붙잡았다. 스님이 차를 따라 주는데 찻잔에 물이 넘치는데도 계속 따르는 것을 보고 맹사성은 방바닥이 흥건하다며 그만 따르라고 했다. 그래도 듣지 않고 스님은 계속 차를 따르면서 “찻잔에 물이 넘치는 것을 알면서, 지식이 지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을 모르십니까?”라고 하였다. 맹사성은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붉히면서 황급히 방문을 나섰다. 그때 문틀에 머리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스님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지요”라고 한 마디를 던졌다. 이후 맹사성은 겸양지덕을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고 결국 명재상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세종실록’에 남아 있는 맹사성 졸기(卒記)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맹사성의 사람됨이 종용하고 간편하며, 선비를 예절로 예우하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제가 얕은 자라도 뵙고자 하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구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가는 것을 보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창녕 부원군(昌寧 府院君) 성석린(成石璘)이 맹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 집이 맹사성의 집 아래에 있으므로 매양 가고 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성석린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맹사성은 부친이 살고 있던 온양의 맹씨행단을 자주 방문하였다. 그때에는 고을의 관가에 들르지 않고 언제나 간소하게 행차하였으며, 더러는 소를 타기도 하였다. 어느 날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의 원님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수령들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수령이 하인을 시켜 그를 불러 꾸짖게 하였다. 그랬더니 그가 하인에게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라고 하였다. 하인이 그대로 고했더니 두 고을 원님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그 와중에 언덕 밑의 깊은 못에 관인(官印)을 떨어뜨렸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관인연(官印淵)이라 이름하였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두 그루 은행나무, 학문을 닦는 곳구괴정 맹씨행단(孟氏杏壇)은 ‘맹 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란 뜻이다. 행단(杏壇)은 공자(孔子)가 은행나무 단 위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맹씨행단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빈집을 지키고 있다. 집주인 맹사성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청빈하고 겸손한 선비정신은 은행나무가 되어 전해지고 있다.
맹씨행단이 있는 아산시 배방읍 중리 마을은 금북정맥의 광덕산이 위쪽으로 달려 솟은 설화산을 진산으로 하고 앞쪽으로는 배방산이 안산으로 자리하며 좌우로 나지막한 산들이 감싸고 있어 아주 아늑한 곳이다. 맹씨행단이 자리 잡은 터는 풍수적으로도 매우 길하여 기를 가득 담은 형세를 지녔다. 맹씨행단은 고려 말기인 14세기 중반에 지어진 집으로 우리나라 민가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중수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기록에 의하면 1482년(성종 13년)과 1632년(인조 10년)에 본채가 크게 중수 됐다고 하며, 집의 방향도 처음에는 손좌(巽坐·손방을 등진 좌)로 있었으나 개수한 뒤로는 계향(癸向·곧 북향)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1929년에 한 번 중수하고 1970년에 다시 크게 중수를 했는데, 그때에도 변화가 많았다. 본래는 안채 앞쪽에 행랑채가 있었고 동쪽으로는 행랑채와 사당을 잇는 낮은 샛담이 있어 사랑채로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맹씨행단 본채에는 고려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맹씨행단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공(工)’자형의 단아한 집이다. 중앙에 2칸 대청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과 왼쪽에 한 칸씩의 작은 온돌방을 둔 홑처마(서까래로 구성된 처마) 맞배지붕(용마루와 내림마루로 구성된 대칭형 구조) 건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려시대 살림집이다. 건축재며 문과 창호(窓戶) 등 작지만 튼실한 고법을 간직하고 있는 기품이 있는 건축물이다. 청빈하고 강직한 선비정신을 간직하고 있었던 맹사성을 그대로 닮아 있다.
북촌 최고의 전망대 맹사성 집터한편 서울 북촌 한옥마을에는 맹사성이 살았던 집터가 있다. 맹사성은 고려 말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1392년(태조 1년) 수원판관을 시작으로 1435년(세종 17년) 좌의정으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할 때까지 43년간 관료 생활을 하였다. 지방관을 역임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벼슬을 중앙관직에 종사하면서 서울에 머물렀다. 그리고 벼슬을 그만두고 1438년(세종 20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세종이 나라의 중요한 정사가 있으면 그에게 자문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맹사성이 세상을 떠나자 백관을 거느리고 직접 빈소를 찾아 문상하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서울 북촌의 맹사성 집터 맹사성 집터에 오르면 서울 동서남북 네 방향의 내사산과 한양도성 경복궁 일대, 청와대 춘추관, 북촌 한옥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북촌 최고의 전망대이다. 현재 맹사성 집터에는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2층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방은 맹사성의 호를 따서 ‘고불헌(古佛軒)’으로 이름 지어져 있다. 고불헌에는 세종께서 신하에게 스승인 맹사성 집에 불이 켜져 있는지 묻고는 불이 켜있으면 “스승이 주무시지 않는데 잠을 잘 수 있느냐”며 스승댁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차장섭 강원대학교 교양학부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조선사연구회 회장, 강원대 도서관장, 기획실장, 강원전통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로 한국사, 미술사 등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