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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무너진 윤리,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입력 : 2025.09.19 15:3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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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코흐 <더 디너> vs 허진호 <보통의 가족>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의 장편소설 <더 디너>는 2009년 출간 이래 무려 네 차례나 영화화된 작품입니다. 숨 가쁘게 소비되고 빠르게 망각되는 출판 시장에서 보기 드문 생명력을 입증한 명작인 <더 디너>는 출간 직후 네덜란드에서만 40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이자 헤르만 코흐의 대표작이지요. 2024년 허진호 감독의 손을 거쳐 재탄생한 한국 영화 <보통의 가족>은 원작 <더 디너>의 서사적 뼈대를 충실히 이으면서도, 일부 설정과 결말부에서 과감한 변주를 시도해 비평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설경구, 장동건, 김희애, 수현 배우가 출연한 <보통의 가족>은 불편한 여운으로 가득합니다. 고급 레스토랑의 향기로운 만찬이 진열된 식탁에서 시작되지만, 영화가 끝난 이후 입안 가득 모래를 씹는 듯한 불온한 기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소설 <더 디너>와 영화 <보통의 가족>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중요한 반전이 글에 나오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아이가 살인자였다니’<보통의 가족>을 기준으로, 줄거리와 인물구도를 되짚어 봅니다. 주인공은 네 사람입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살인자도 변호하는 변호사 재완(설경구), 사별한 재완과 재혼한 젊은 아내 지수(수현), 성심을 다해 환자를 돌보는 따뜻한 마음의 소아과 의사 재규(장동건), 치매 걸린 시어머니(남편 재규의 모)를 간호하는 전문 번역가 연경(김희애). 형제와 그들의 부부는 한 달에 한 번쯤은 레스토랑에서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재규의 아내 연경은 자신 보다 한참 어린 ‘형님’(지수)의 존재가 다소 못마땅하지만 네 사람의 우애관계는 그럭저럭 유지됩니다.
두 부부에겐 각각 10대 아이가 있습니다. 재완의 딸 혜윤, 그리고 재규와 연경의 아들 시호였습니다. 레스토랑에서 만나 만찬을 즐기고 자리를 파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재완과 재규와 연경은 자신들의 아이들이 심각한 사건을 저질렀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됩니다. 공부 잘하는 모범생 혜윤과, 학업 스트레스가 과하긴 해도 여린 성격이었던 시호가 길거리 노숙자를 폭행했고, 결국 중태에 빠진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폐쇄회로(CC)TV에 찍힌 제보 동영상이 지상파 뉴스에 보도되고 사건은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하는데, 아직 경찰이 혜윤과 시호를 용의자로 특정하지 못했음에도 두 부부는 동영상 속 10대 가해자들이 우리 아이들임을 알게 됩니다. 다시 식탁에서 만난 네 사람. 그들은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그러나 어둡고 심각한 낯빛으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을 자수시키는 게 최선일지, 아니면 사건을 이대로 묻어버릴지를 말이지요. 냉철했던 변호사 재규는 오히려 양심적인 결단을 내리려 하고, 그저 선인인 줄만 알았던 연경은 “우리 애 앞길을 이렇게 망칠 순 없다”며 반박합니다. 고뇌하던 재규는 형과 아내 옆에서 두 사람 곁에서 갈등합니다. 그런 가운데, 폭행 후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노숙자가 결국 숨을 거두고 아이들의 죄명은 ‘폭행’이 아니라 ‘살인 혹은 과실치사’가 됩니다. 네 사람은 생각합니다. ‘이것은 죄인가? 아니면 죄가 아니게 만들 수도 있는가?’
이제부터 네 사람이 앉은 테이블은 단지 음식이 놓인 식탁이 아닌, 위선과 죄의식이 까발려지는 최악의 저질 심판대가 됩니다.
폭력과 유전<보통의 가족>의 원작 <더 디너>에선 영화 속 재규(장동건)에 해당하는 인물인 파울 로만이 1인칭 화자 ‘나’로 등장합니다. 파울의 형 이름은 세르게, 그의 형수는 바베테, 파울의 아내는 끌레르이며, 사고를 저지른 아이들의 이름은 릭, 미헬입니다. <더 디너>는 영화와 달리 파울과 미헬의 대화, 그리고 파울의 과거에 대한 1인칭 회상이 주를 이루는데 많은 부분에서 영화적 각색이 이뤄졌지만 특별히 되짚어야 하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동생이자 화자인 파울의 성격이 영화 속 선한 재규와 상이하게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파울은 한때 교직에 몸담았지만 수업 도중에 학생들, 나아가 학부모들과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켜 지금은 퇴직한 인물입니다. 파울은 직장인 학교에서나 학교 밖 일상 공간에서나 늘 갈등을 일으켰고 극도의 폭력적 성향을 자주 보였습니다. 가령 미헬이 8세 때 공놀이를 하다 자전거 가게의 유리창을 깨는 일이 벌어졌는데, 아빠인 파울은 보상을 위해 자전거 가게를 찾았다가 사장의 잔소리가 길어지자 화를 누르지 못한 채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잠깐만. 그 아가리 좀 닥치지 그래? (중략) 대체 뭐가 문제야. 이 멍청한 새끼야. 요는 창문이 깨진 거잖아. 그거 하나 깨뜨렸다고 여덟 살짜리 꼬마를 이런 식으로 모욕해?”(167~168쪽). 그는 타이어 펌프로 가게 사장을 내리치려 합니다. 파울은 아들 미헬이 다니던 학교의 교장 선생님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꽤 많은 양이었다.’(317쪽). 자신의 형인 세르게를 벌겋게 달아오른 냄비로 폭행한 적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폭력을 반복하는 파울 곁에는 그런 아빠를 지켜보는 미헬이 늘 자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파울은 아들에게 자신의 폭력적인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고 나서도, 자신의 행동은 정당했다며 합리화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영화 <보통의 가족> 속 재규는 다르지요. 재규는 신념에 반하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고, 아들 시호의 일탈에 분개하며 자수를 고민하는 선량인 시민입니다. 그러나 결말 부분에선 아들 시호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형 재완을 ‘차로 밀어버리는’ 믿기 어려운 선택을 합니다. <더 디너>의 파울과 <보통의 가족>의 재규의 이런 성격 차이는 뭘 의미할까요.
악인 파울에서 선인 재규로의 변화는 단지 ‘재규의 마지막 선택(형 재완을 살해)’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작품의 주제의식을 바꾸는 효과를 거두니까요.
분노조절장애가 분명해 보이는 파울의 폭력성은, 아들 미헬의 폭력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른바 폭력의 유전이었습니다. 파울의 폭력적 언행을 보고 자란 미헬이 노숙자의 얼굴에 불을 지른 건 그런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자란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파울의 폭력적인 과거가 아들 미헬의 범죄와 유관함을 독자는 간파하게 되고, 이 사회의 무너진 윤리에는 어른들의 책임이 있음을 소설은 구조화합니다. <더 디너>가 ‘아이들의 폭력은 붕괴된 윤리의 시대를 만들어낸 어른들에게 그 책임이 있지 않은가’란 질문을 건네는 반면, <보통의 가족>은 ‘선량한 얼굴을 한 인간조차 극단적인 상황, 특히 자신의 자식에 관한 일이라면 폭력적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지 않은가’란 주제를 형성합니다.
악에게 면죄부를 준다면그런데 여기서 좀 더 깊게 들어가,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원작에서 파울이 학교에서 가르친 교과목이 바로 ‘역사’란 점입니다. 역사 교사 파울이 사실상 쫓겨나듯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파울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를 능욕하는 발언을 합니다. 파울 주장의 요지는 이랬습니다. 전쟁 희생자 5500만 명이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은 없는데, 그들이 참극의 희생자로만 숭고하게 기억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파울은 엄연히 증명된 사실을 자꾸만 ‘재해석’하고 ‘재구조화’하려 합니다. 희생자라고 불린 이들의 죽음이, 실제론 희생이 아닐 수 있다는 식이었지요.
파울은 심지어 이런 결론을 냅니다. ‘진실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어느 쪽의 진실이든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204~205쪽)
역사에서의 사실이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성에 기댑니다. 그러나 파울처럼 인간의 기억을 쉽게 왜곡하고, 역사란 해석하는 이들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다고 가르친다면 사실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세르게와 파울의 아이들인 릭과 미헬이 저지른 살인을 ‘살인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으로 해석된다면 이 세계에 엄존하는 사실이란 모두 부정되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파울의 형 세르게의 직업은, 영화 속 재완의 직업인 변호사가 아니라, 차기 수상(首相) 후보인 유력 정치인입니다. 변호사가 사적 직업이라면 수상 후보는 공적 직업이지요. 수상 후보인 형 세르게와 전직 역사 교사인 동생 파울의 행적을 보면서 <더 디너> 독자들은 이 작품을 사회적 층위에서 바라보게 되지요.
<더 디너>는 이쯤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합니다. 바로 히틀러의 나치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듯한 발언을 파울이 일삼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의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될 희생이 아니었다고 본다면, 이는 절대악의 상징인 히틀러 역시 면죄부를 받아도 마땅하다는 논리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런 논법은 독자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줍니다. 역사에서의 악한 행동, 도덕성의 붕괴가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윤리는 무너지니까요.
결국 <더 디너>는 사실이란 언제든 비틀린 거짓일 수 있으며, 역사에서의 선악 역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를 우리에게 질문하는 문제작입니다. <보통의 가족>이 살인을 저지른 부모의 딜레마적 선택에 집중하는 반면, 소설 원작은 사실이란 언제든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시대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는 시선을 유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