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우석의 누보 파리(Nouveau Paris)] K-패션과 K-아트 융합 파리에서 싹 틔운 컨셉코리아

    입력 : 2025.04.03 16:01:49

  • ‘테서렉트(tesseract)’라는 개념이 있다. ‘4차원 유클리드 공간의 정사각형’으로 정의 내려지는 이 개념, 다소 생소하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가 딸 머피를 만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미래의 쿠퍼가 과거의 머피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쿠퍼와 머피가 연결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테서렉트다. n차원에서의 정다면체는 (n-1)차원에서의 정다면체들이 연결되어 구성된 것이라는 과학적 담론에 근거한 정의다. 2차원인 면을 연결하는 순간 3차원이라는 공간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3차원 공간도 서로 연결되는 순간 4차원이 된다. 하지만, 우리 눈에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기도 하다.

    오늘의 주제, 스스로가 창조하고 경험할 수 있는 테서렉트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초대했다. ‘상상력의 철학’이라는 독특한 사유 방식을 발전시킨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집은 우리의 과거를 담고 있으며, 우리가 떠난 뒤에도 우리의 존재를 품고 있다.” 그가 《공간의 시학》 (La Poétique de l’ Espace, 1957)에서 남긴 말이다. 그에게 있어,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감정과 기억이 스며든 심리적, 상징적으로 살아있는 개념인 것이다. 공간은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상상력에 의해 현실은 확장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의 상상은 옛기억을 소환하고 미래를 그리기도 하며, 그 공간들이 서로 연결돼 시공을 초월한 현재를 완성하게 된다. 상상력으로 현실을 확장해 보자. 어떤 공간부터 시작할까? 집? 차? 아니면 회사?

    인간이 인식하고 경험하는 가장 가깝고 근원적인 공간, 의복. 디올(Dior)은 말했다. “패션은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인간은 옷이라는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생명체인지 모른다. 화려함의 정수라는 프랑스의 예술성은 패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파리의 패션 브랜드들은 사람들이 패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돋보일 수 있도록 가치를 파는 일에 집중한다. 그들에게 패션쇼는 브랜드가 추구하는 예술적 영감의 정수를 표현하는 화산분출과 같은 시간이다.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을 장식한 상상력에 몰입해 사람들은 삶의 가장 화려한 시공간을 꿈꾼다. 상징적인 사례들도 많다.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클로드 모네의 ‘수련’,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과 같은 명작들이 현대 미술가 제프 쿤스에 의해 루이비통으로 재해석되었고, 프랑스 작가 다니엘 비르카의 예술적 모티브인 격자무늬는 샤넬의 패션쇼를 장식하며 크게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들이 예술적 모티브를 차용해 브랜드의 가치와 이미지를 높이는 전략은 자신만의 공간을 확장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2025FW 므아므 무용수
    2025FW 므아므 무용수

    브랜드의 영감 안에 소비자의 상상력을 붙잡아 두려는 프랑스인들의 전략과는 차별화된 한국적 확장성이 돋보인 패션쇼가 최근 파리에서 열렸다. 한국 콘텐츠진흥원이 ‘K-패션과 K-아트의 융합’을 주제로 지난 3월 7일 파리 현대예술의 명소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에서 개최한 컨셉코리아 2025 F/W. K-패션의 세계화를 목표로 2010년 시작된 프로그램의 올해 파리패션위크 행사에는 리이(Re Rhee), 므아므(MMAM), 잉크(EENK), 세 브랜드가 참여했다. 이혜미 디자이너의 잉크(EENK)는 쁘렝땅 백화점 팝업스토어를 통해서 이미 파리 현지에서도 인지도가 높은데 이번 콜렉션에서 김수자 화백의 작품에서 받은 영감을 한 권의 책(B for Binding)처럼 엮어내 찬사를 받았고, ‘잔향의 형태’를 주제로 한 리이, ‘대조적인 층위(Contrasting Layers)’를 내세운 므아므도 시적인 주제만큼이나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지난해 파리패션위크의 S/S 시즌에 이어 연속으로 참여함으로써, 짧은 시간 놀라운 성장 속도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이들 패션 브랜드의 가능성만큼이나 주목을 받은 건 패션쇼라는 공간에서 선보인 강력한 확장성이다.

    동일한 런웨이는 차원을 달리하며 전혀 다른 공간이 된다. 므아므의 패션쇼. 모델들의 워킹이 시작되기 전 블랙 스완을 연상시키는 발레리나가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동선으로 런웨이를 지배한다. 팔레 드 도쿄의 긴 공간을 이어가는 현대 무용가 이루다의 춤선은 마치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 송화(오정혜)가 푸른 언덕길을 내려오며 판소리 ‘진양조 창성가’를 부르는 모습을 주인공의 뒤를 따라가며 풍경과 인물의 감정까지 담아낸 임권택 감독의 롱테이크 명장면을 연상시킨다. 잉크의 패션쇼에서는 런웨이를 걷는 모델들의 배경음악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 신중현이 등장한다. 생경하고 강렬하다. 1969년 김추자가 부른 신중현 작사 작곡 《떠나야 할 사람》의 애절한 가사가 보컬 김선의 굵은 소리에 녹아 나풀거리는 코트 원단 사이로 절제되어 흐른다. 런던에서의 외로운 시간을 위로한 노래 <안개>가 모티브가 되어 탄생했다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느낌마저 소환한다.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과 기억이 한 순간에 폭발하는 느낌이다. 아트 디렉터의 영감에 종속된 상상력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이끌어 내는 가스통 바슐라르적 확장성이다.

    이루다의 동선도 신중현의 노래도 영화 〈서편제〉와 〈헤어질 결심〉만큼이나 미장센이 아름답다. 이러한 확장성은 패션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고 런웨이와 일상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효과가 있다. 우리 문화의 다양한 3차원들이 패션쇼라는 테서락트의 꼭짓점을 만나 서로 연결되고 우리의 공간들이 상상력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믿음을 경험한 순간이다.

    패션을 소비하는 고객은 런웨이를 걷는 모델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다. 이미 세계는 우리 문화의 역동성을 자신들 삶의 일상 공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K-POP, 드라마, 영화, 미술 등 각각의 전문 영역에서 주목받는 우리의 문화 역량이 서로 연결되고 상상력으로 확장되기를 기대해 본다. 쿠퍼가 시공을 초월해 머피에게 메시지를 전달한 것처럼, 우리의 다양한 분야 예술가들이 시공을 초월해 연결되고 서로에게 가능성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김원준의 노랫말로 마무리한다. “쇼, 끝은 없는 거야. 난 주인공인 거야.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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