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현권의 뒤땅 담화] 골프와 술은 천생연분인가 양날의 칼인가

    입력 : 2025.01.23 17:17:13

  • 얼마 전 아침 8시 티 오프를 앞두고 식사를 해결하려고 클럽하우스 식당에 들어가면서 흠칫 놀랐다.

    옆자리에 중년 남성들이 소주 2병을 곁들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보통 전반 라운드를 돌고 간단하게 막걸리나 맥주를 마시는데 골프 시작 전에 그것도 이른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경우는 드물다. 골프장에서 정말 돈이 아깝지만 유혹을 참지 못하는 게 있다. 전반을 끝내고 그늘집에서 마시는 막걸리이다. 골프장마다 다르지만 한 통에 1만6000~2만원 정도다. 편의점에서 막걸리 1통에 2000원 안팎인 것을 감안하면 10배 정도 자릿세를 내는 셈이다. 안주로 김치나 멸치가 쥐방울만큼 나오는 폭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막걸리를 마시면서 라운드 내내 최고조로 끌어올린 긴장을 푼다.

    집중하느라 서로 못한 이야기 보따리도 그제서야 푼다. 골프 삼락(三樂)이 있다. 골프가 끝난 후에 비가 오고(나는 웃고 다른 사람은 운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켜는 일이다.

    골프만큼 술과 궁합이 맞는 종목도 드물다. 골프와 위스키 본산이 같은 스코틀랜드라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골프 해방구’로 불리는 미국의 피닉스오픈이 열리는 날에는 갤러리들이 아예 홀 근처에서 술 파티를 벌인다.

    음주는 아마추어에게만 통하는 말이지 프로골프 선수들은 술에 관한 한 무척 신중하다. 아예 대회 며칠 전부터 술을 자제한다. 단연코 술로 일세를 풍미하는 사람은 존 댈리(58)다. 알코올 중독 치료까지 받은 댈리는 말 그대로 필드의 풍운아. 2003년 한국오픈에서도 우승한 그는 PGA투어 5승에다 처음 300야드 장타 시대를 열었지만 결국 과음으로 골프 수명을 단축시켰다. 쇠락한 댈리는 한때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에서 판을 깔고 자기 이름으로 용품을 판다는 소식도 있었다. 장타무상(長打無常)이다.

    우즈(49)도 전처와 이혼 후 슬럼프에 빠져 음주운전으로 체포되고 큰교통사고를 당해 전성기에서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국내에서도 유명 선수들은 대부분 술을 멀리한다. 한국 골프 간판스타 최상호(69), 최경주(54), 양용은(52)은 가벼운 와인에 그치지 술을 즐기지는 않는다. 프로골프대회에서 음주를 금한다는 별도 규정은 없다. PGA투어는 2017년부터 혈액검사를 의무화하면서 엄격한 도핑 방지 프로그램을 적용하지만 알코올을 금지 약물 리스트에 올려놓지 않았다.

    사진설명

    하지만 술을 잘 못하는 아마추어 골퍼에게도 18홀을 돌고 샤워 후 들이켜는 맥주 한잔은 감로수다. 골프 후에 동반자와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입으로 하는 라운드 복기를 19홀이라고 한다. 핸디캡(Handicap)이란 단어도 골프를 끝낸 후 술자리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술자리가 파할 무렵 모자를 벗어 든 사람이 멤버들로 하여금 돈을 쥔 주먹을 모자에 넣게 하면서 비롯됐다.

    “핸드 인 드 캡(Hand in the cap)!” 하고 외치면 모자 안에서 주먹을 편다. 주머니 사정에 따라 넣는 돈이 얼마인지 모르게 하려는 배려다. 유달리 한국에선 골프 도중 술이 빠지지 않는다. 겨울엔 그늘집에서 따끈한 청주, 여름엔 시원한 생맥주나 막걸리가 긴장과 스트레스를 푸는 해독제이다. 돈을 아끼려고 막걸리를 싸들고 오는 사람도 있다. 주류업체들은 술과 골프의 환상 궁합을 이용해 골프대회 타이틀 스폰서나 선수 후원으로 많이 나섰다. 지난 세월 동안 단일 업종으로 주류업체가 골프대회에 가장 많은 이름을 걸었다.

    발렌타인 챔피언십, 조니 워커 클래식, 미켈롭 챔피언십, 기린오픈, 하이트 진로배 등 많은 골프대회가 열렸다. 고진영(하이트 진로)과 안시현(골든블루) 같은 스타 골퍼도 주류회사가 후원했다.

    역대급 선수들은 아예 주류사업에 뛰어들었다. 작고한 아널드 파머는 자기 농장 포도로 만든 와인에 ‘아널드 파머’란 브랜드를 새겼다.

    호주 출신 그렉 노먼(69)도 와이너리 사업에 투자했다. 캘리포니아 포도 농장 사이에 골프 코스를 설계할 정도로 와인 애정이 깊다. 어니 엘스(55)는 남아공 와인을 전 세계에 알린 주역이다. 와인 가운데 1865라는 브랜드가 있는데 18홀에 65타라는 뜻으로 구전돼 골퍼들 사이에 인기가 좋다. 골프 후에 마시거나 상품으로 사용된다. 이 숫자는 칠레 와인 생산업체인 산 페드로의 설립연도이다. 골프와 술은 일란성 쌍둥이다. 우선 최적 멤버가 4명이란 점이다. 술자리에서 3명은 허전하고 5명 이상이 모이면 대화 초점이 흐려진다. 골프 멤버도 4명이 베스트다. 적당하게 보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리스크가 분산되고 승부가 흥미진진하다. 처음 배울 때가 중요하다는 점에서도 일맥상통한다. 어른 앞에서 술을 배워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잘못 배우면 주사로 평생 고생한다.

    “골퍼 스타일은 좋건 나쁘건 골프를 시작한 일주일 안에 굳어진다”는 해리 바든의 말처럼 스윙자세, 진행속도, 매너도 평생 그대로 간다.

    끝나봐야 실력(핸디)과 인격이 드러나는 점에서도 둘은 유사하다. 골프 18홀을 돌고 나면 인품과 실력이 저절로 나온다. 술자리도 5시간 함께 하면 상대방 내공과 인성을 알게 된다. “얼굴은 거울에 비치고 인격은 술에 비친다”는 명언도 있다. 접대 수단으로도 이만한 게 없다. 요즘은 덜하지만 골프와 술은 김영란법 이전까지만 해도 최고 접대 수단이었다. 골프와 술이 어우러질 때 접대 상승 효과는 가공할 만하다. 단기간에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에도 둘은 효과 만점이다.

    한두 번 약속을 어기면 잘 부르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사람들이 골프와 술 약속을 웬만하면 어기지 않으려는 이유다. 그래도 술은 골프에서 양날의 칼이다. 전날 과음하면 다음날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술냄새 풍기며 예정 시간에 늦으면 그 자체로 민폐다. 골프가 맘대로 안 되면 본인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동반자도 괴롭다. 골프는 하루 전날 침대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고수는 가능하면 전날 저녁 약속을 피해 안정을 취한다. 그늘집에서 가볍게 한잔 하면 무방하지만 원하는 샷이 안 나온다고 필드를 술판 분위기로 몰아가면 이기적이다. 무엇보다 술 마시고 카트 운전이나 스윙에 따른 안전 사고에 유의해야 한다.

    “남자가 첫 잔을 들 때와 여자가 마지막 잔을 들 때는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O 헨리)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

    매일경제신문에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와 연을 맺었다. <주말골퍼 10타 줄이기>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었다. 매경LUXMEN과 매일경제 프리미엄 뉴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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