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톰 포드 <녹터널 애니멀스> vs 오스틴 라이트 <토니와 수잔> 잉크로 쓴 복수의 칼이 너를 찌를 때

    입력 : 2023.07.14 10: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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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을 창작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복수심이 아닐까요. 소설이나 시를 쓰는 까닭은, 대개 ‘나’의 내면 바깥에 위치한 어떤 대상을 겨냥한 앙갚음의 감정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니까요. 그것을 ‘지배욕’으로 부르든 ‘인정 욕구’로 일컫든 본질적인 감정은 복수하려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문장으로 써 내려간 날이 선 칼로 세상을 할퀴기도 하고 타인을 베려고도 하니까요. 저 칼끝이 자기 자신까지 찌를 듯한 기세로 뾰족해질 때 비로소 (여러 의미에서의) ‘좋은’ 문학이 출현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에이미 애덤스, 제이크 질런홀 주연의 <녹터널 애니멀스>는 오스틴 라이트의 장편소설 <토니와 수잔>을 원작 삼아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뉴욕 11개 출판사로부터 출간을 거절당했지만 소규모 출판사에서 책으로 나와 비평계 호응을 얻었고 영화로 만들어져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지나친 잔혹성과 여성혐오 등의 이유로 강추와 비추를 넘나들지만 현대판 그리스 비극을 연상시키는 매력이 그득한 작품이란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빨간 사과의 독

    아트 갤러리 소유주 수잔 모로의 시선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어느 날, 그녀에게 묵직한 소포가 배송됩니다. 수잔이 20대 시절을 함께 했던 전 남편 에드워드 셰필드가 발송한 소포였습니다. 봉투를 뜯어보니 에드워드의 신작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Nocturnal Animals·야행성 동물)’가 A4용지에 프린팅되어 있었습니다. 수잔과 에드워드는 1년간 함께 살았던 부부 사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다름에 끌렸지만 현실을 사는 수잔은 이상을 꿈꾸는 에드워드에게 결국 질리기 시작합니다. 수잔은 소설가 지망생이던 남편 에드워드에게 “재능이 없다”며 냉혹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결국 수잔은 에드워드와 작별합니다. 그런데 20년쯤 흘러 느닷없이 에드워드가 수잔에게 새 소설의 감수를 요청한 것이지요. 앞장에 ‘For Susan’이라고 적힌 소설을 보며 수잔은 불안해집니다. “거기에 숨겨진 다른 메시지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잔과 에드워드를 위한 은밀한 사랑 노래인가? 아니면 증오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악당이라면 에드워드의 원고에서 빠진 건 백설공주의 빨간 사과에 발라놓은 독 같은 거겠지.”(소설 <토니와 수잔> 12쪽)

    에드워드 소설의 주인공은 남성 토니 헤이스팅스입니다. 토니는 아내 로라, 딸 인디아와 서부 텍사스로 여행을 떠납니다. 휴대전화 신호도 잡히지 않는 직선의 도로. 토니 가족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무뢰한들의 차량과 시비가 붙습니다. 토니는 이성적으로 해결하려 하지만 작정하고 덤비는 녀석들과는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놈들은 토니를 무력으로 제압한 뒤 로라와 인디아를 차에 태워 어둠 속으로 떠나버리지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망하게 가족을 납치당한 토니는 차량을 빼앗기고 도로를 헤맵니다. ‘차라리 강간으로 이 무지막지한 악몽이 끝나기를’ 갈망했던 토니의 마음은, 결국 주검이 되어 발견된 아내와 딸 앞에서 짓이겨집니다. 토니는 보안관 바비의 도움을 받아 세 명의 악한을 뒤쫓습니다.

    ‘에드워드와 수잔’이 아닌 이유

    에드워드가 수잔에게 이런 끔찍한 내용이 담긴 소설을 보낸 이유는 뭘까요. 이에 답하려면 에드워드의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의 함의를 곱씹어봐야 합니다.

    찰나의 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리는 토니의 상황은 비이성과 부조리를 상징합니다. 밤의 도로는 그들이 거쳐 가야만 했던 삶의 시간을, 아내와 딸을 무력하게 잃는 토니는 무능하고 연약한 인간이 되어버리지요. 삶에 틈입하는 부조리에 노출된 토니는 다가오는 재앙을 막을 동력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재앙은 토니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야만의 얼굴로 다가옵니다. 재앙은 문명의 속도나 방향에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 삶에 개입하는 무작위입니다. (소설에는 없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거대하고 육중한 여성의 나체 춤은 전시되고 관람됩니다. 대중 앞에 놓인다는 것은 질서에 따라 통제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수잔이 거주하는 빌딩은 거대한 야생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부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통제되지 못함을 이야기하지요.

    이때 에드워드의 소설은 두 가지 목적을 향합니다. 먼저 일차적으로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는 아내 수잔을 지키지 못했던 에드워드의 나약함을 되새김질하게 만듭니다. 현실의 에드워드는 소설 속 토니와 등가를 이루는데, 에드워드의 나약함을 소설화함으로써 에드워드의 반성적 사유를 수잔에게 전해주지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에드워드는 로라와 인디아를 살해한 뒤 이 장면을 극도로 세밀하게 묘사하여 글을 읽는 수잔에게 극단적인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던져줍니다. (이것이 이 소설의 진짜 목적인, 복수겠지요.)

    수잔을 향한 에드워드의 복수는 비이성과 부조리, 즉 자신이 뜻하는 바대로 인생이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불운과 불행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다는 억압을 수잔이 절절하게 느낌으로써 성립됩니다. 작가 오스틴 라이트는 이 점을 소설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그녀(수잔)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누군가가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밤에 얼어붙은 고드름 같은 한 줄기 공포가 그녀의 심장을 관통한다.”(52쪽)

    <녹터널 애니멀스>의 단어적 의미는 ‘야행성 동물’입니다. 야행성 동물은 어둠 속 두려움에 노출된 존재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생태계에서는 그 어떤 존재든 피포식자로의 전락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저 멀리 다가오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불가능한 황혼(이른바 ‘개와 늑대의 시간’)을 지나, 소설 속 토니와 소설 밖 수잔이 겪는 시간은 모든 그림자조차 불안과 공포로 다가오는 밤의 시간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오스틴 라이트가 의도한 제목이 ‘에드워드와 수잔’ 혹은 ‘토니와 로라’가 아니라 <토니와 수잔>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겁니다. 토니의 불안은 수잔의 불안과 다르지 않고 길항합니다. 소설을 읽으며 공포와 두려움을 느낀 수잔은 자신의 삶을 둘러싼 균열적인 불안을 비로소 마주하게 됩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과 달리 수잔과 그의 남편은 경제적 파산 위기에 놓여 있고, 또 남편은 다른 여성과 주기적으로 잠자리를 갖는 게 확실해 보입니다. 에드워드는 수잔에게 불안을 선물처럼 돌려주면서 선언한 것이지요. “이제 네가 고통을 당할 차례야.”

    붉은 소파 위의 시체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와 소설 <토니와 수잔>은 설정이 거의 비슷하지만 감독 톰 포드는 영화적으로 여러 변용을 시도했습니다. (패션 브랜드 톰 포드의 바로 그가 맞습니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 연출작입니다.) 영화에서 아트 디렉터인 수잔은 소설에선 세 남매를 양육하는 가정주부입니다. 또 영화에선 토니의 나약함을 강조하려 방금 가족을 잃어버린 그가 욕조에서 한심하게 우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하지요.

    톰 포드 감독의 영화적 변주 가운데 가장 야심찬 대목은 영화에만 등장하는 ‘붉은 소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녀 로라와 인디아가 발견되는 장소는 소설에선 숲속의 나무 아래입니다. 헐벗은 두 구의 시체가 나무 아래 뒤엉킨 채 발견됩니다. 영화에선 로라와 인디아의 시체가 발견되는 장소가 쓰레기 소각장에 버려진 붉은 소파로 나옵니다. 영화를 자세히 보면, 저 붉은 소파는 현실의 토니에게 지독하게도 잔인한 장소였습니다. 오래 전 수잔이 에드워드에게 “재능이 없다”고 말했던 장소가 붉은 소파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환언하면, 저 붉은 소파는 수잔이 에드워드에게 작가로서의 죽음을 언도한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사형집행장입니다. 에드워드는 로라와 인디아의 시신을 붉은 소파 위에 눕혀버림으로써 수잔에게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죽음의 슬픔을 되돌려줍니다. 소파가 위치한 장소가 쓰레기 소각장이란 점도 주목할 필요가 크지요. 에드워드는 20년 전 수잔이 온갖 감정을 버리고 떠난 폐허 위에서, 덜 소각된 감정의 잿더미를 어루만지며, 그 어두운 감정으로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를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간 것이 아닐까요.

    영화에는 수십 개의 화살을 맞은 염소를 박제한 데이미언 허스트의 2006년작 ‘성인 세바스찬, 정교한 고통(Saint Sebastian, Exquisite Pain)’이 등장합니다. 수잔은 고통을 전시품처럼 사용했지만 그 고통에 애써 다가가진 않았습니다. 에드워드가 쓴 글을 읽고 나서야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삶을 조여오는 고통의 올가미를 체감합니다. 데이미언 허스트가 오브제 삼은 염소가 느꼈을 고통은 에드워드의 것이었다가 수잔의 것으로 전환됩니다.

    언어의 창조자는 그 언어가 만들어낸 성의 안과 밖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절대자입니다. 그는 초월적 존재가 되기도 하고 신적인 지위를 획득하기도 하지요. 언어를 활용한 예술은 최고의 복수극이 되기도 합니다. 타인을 고통의 한가운데 위치시킨 뒤 대상을 살려둘 수도, 대상을 죽일 수도 있는 권능을 집필과 동시에 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늘 현실보다 뒤처진다지만 상상 안에서 자행되는 모든 행동이 현실로 뒤바뀐다면 인간에게 예술은 아마도 필요가 없을 겁니다.

    에드워드가 쓴 소설의 재미는 극중 인물의 고통과 비례하는 모순점을 가집니다. 자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여성 로라와 인디아의 고통, 그리고 그들을 찾아 헤매는 남편 토니가 겪는 고통이 진해지고 깊어질수록 수잔이 느끼는 소설 읽기의 흥미도 커집니다. 자기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소설 속 인물이 죽음에 근접할수록 현실에서의 소설은 더 재미를 더해간다는 기묘한 모순은 그 자체로 슬프고 폭력적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들여다보는 것, 그러므로 이 작품은 언어 예술에 관한 한 편의 장대한 은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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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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