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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러시아 낭만주의의 마지막 대가 위대한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
입력 : 2023.04.04 17:3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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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라흐마니노프 기념의 해’이다.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4월 1일 러시아 노브고로드에서 태어나 1943년 3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유난을 떨 필요는 없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그의 생전이나 지금이나 전 세계 청중으로부터 변함없는 각광과 사랑을 받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당대의 전문가들, 다시 말해 비평가, 음악학자, 역사저술가들의 시각은 사뭇 달랐다. 그 단적인 예로 1950년대에 발간된 <그로브 음악사전> 5판의 필자는 이렇게 썼다.
“라흐마니노프는 당대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작곡가로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속했다고 평가되는 일은 거의 없다. (…) 생전에 그에게 어마어마한 대중적 성공을 안겨준 소수의 작품들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며, 연주자들도 그의 작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 그런 편향된 평가에 동의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은 연주회 흥행의 보증수표로 통하고,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과 ‘교향곡 2번’도 여전히 각광받고 있으며, 만년의 걸작들인 ‘교향곡 3번’과 ‘교향적 무곡’에 대한 수요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또 24개의 전주곡, 두 세트로 이루어진 ‘회화적 연습곡’ ‘피아노 소나타 2번’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등 피아노 독주곡들은 다수 피아니스트들에게 선망과 도전의 대상이다.
라흐마니노프 차이콥스키의 후계자작곡가로서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낭만주의의 마지막 대가’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타네예프와 아렌스키에게 작곡과 이론을 배웠는데, 두 스승은 차이콥스키의 뒤를 이은 러시아 낭만주의의 적자들이었다. 음악원 시절 라흐마니노프는 진지하고 과묵하며 어딘지 음울한 성격의 학생이었다. 게다가 남달리 고집이 세고 주관이 뚜렷해 스승들에게 대들기도 했다. 일례로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완성해서 시연했을 때는 지휘를 맡은 선생님의 간섭을 단호히 거절했을 뿐 아니라 리허설 과정에서 지휘자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했다. 자칫 스승과 학우들의 반감을 살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의 출중한 재능과 조용한 자신감은 오히려 찬탄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라흐마니노프는 단막 오페라 <알레코>를 졸업 작품으로 제출하여 최우수 성적으로 음악원을 졸업했는데, 이 오페라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관심도 끌었다. 차이콥스키는 <알레코>가 황실 오페라 극장에서 상연되도록 주선했는데, 그것도 자신의 오페라와 나란히 무대에 올리겠다고 제안하여 스무 살의 작곡가를 놀라움과 감격에 빠트렸다. 차이콥스키는 라흐마니노프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라흐마니노프도 존경하는 차이콥스키를 귀중한 멘토로 여겼다. 얼마 후 차이콥스키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겼고, 그는 ‘비가 트리오 2번’을 예술적 아버지의 영전에 바쳤다.
두 작곡가는 공통점이 많았다. 공히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천재였고, 독일 음악의 토대 위에서 러시아 특유의 멜랑콜리를 풍부하고 깊이 있는 선율로 노래할 줄 알았다. 문제는 라흐마니노프가 그런 낭만주의적 어법을 평생 고수했다는 데 있었다. 그의 성숙기는 음악계에 아방가르드의 조류가 급격히 범람하던 시기와 겹쳤고, 덕분에 그는 시대착오적인 작곡가, 대책 없는 보수주의자로 폄훼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치부하기에 그의 음악은 너무도 빼어났다. 무엇보다 기법적 완성도에 더하여 듣는 이의 가슴을 파고드는 묵직한 진정성이 그의 음악에는 존재한다. 결국 음악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진심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밴 클라이번 콩쿠르 결승 무대에서 콩쿠르 심사위원장인 마린 앨솝의 지휘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을 연주하고 있다. 귀감이 될 만한 고전적 피아니즘라흐마니노프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러시아의 전설적인 피아노 스승 즈베레프 문하에서 수련을 쌓은 그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쟁쟁한 학생들이 많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했다. 다만 젊은 시절의 그는 피아노 연주보다는 작곡에 더 뜻을 두어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두 개의 인기 피아노 협주곡 외에도 두 개의 교향곡, 칸타타 교향곡 ‘종’, 교향시 ‘망자의 섬’, 그 밖에 여러 가곡과 피아노곡을 발표했고, 지휘자로서도 크게 인정받았다.
그러나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직후 서방으로 망명한 그에게는 한동안 작곡에 전념할 겨를이 없었다. 거의 빈털터리로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왔기에 작곡보다는 생계유지에 유리한 연주가 활동에 무게를 두어야 했던 것이다. 망명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 변신하여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작곡 활동은 생활의 안정과 여유를 되찾은 1930년대에 들어서야 재개했는데, 주로 여름휴가 기간을 이용해 소수의 작품만을 남겼다.)
투명하고 다채로우면서도 따뜻한 음색, 완벽에 가까운 기교, 절제된 접근 속에 기품이 배어있는 표현력, 절묘한 균형과 통일성을 담보하는 구성력 등을 아우른 그의 고전적 피아니즘은 두고두고 귀감이 될 만한 것이었다. 실로 그는 ‘거장 피아니스트들의 전성시대에도 서너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쟁쟁한 기교파 피아니스트들 사이에 홀로 떠있는 별’(헤럴드 숀버그)이었다.
황장원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