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vs 다니엘 아르비드 ‘단순한 열정’ | 모든 열정은 상실과 결핍에 기댄다

    입력 : 2023.04.04 17:15:36

  • 이국의 한 거리, 한 여성이 먼 곳에서 한 남자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오래전의 어느 날, 둘은 서로를 극도로 사랑하며 몸을 섞던 사이였습니다.

    여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말합니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크린 속 여자의 눈앞에 보이는 저 남자는 허상입니다. 지독한 상실이 실재를 넘어 환상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최근 개봉한 영화 <단순한 열정>의 첫 장면은 이렇게 열립니다. 그리고 나체가 된 두 사람의 침대 위 정사가 시작되고 다시 정사, 또 정사가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반복되는 불륜의 정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 영화임이 분명합니다. <단순한 열정>은 2020년 칸국제영화제 초청작이었고(코로나19로 2년을 묵혔다가 이번에 한국에서 개봉), 2022년 10월 이 영화의 원작자인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되며 다시 회자된 바로 그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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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일 수 없는 것

    남녀 간의 사랑, 정사, 불륜을 주제 삼은 문학작품이 영화로 육화되는 경우 대개 그 작품은 실패로 귀결되곤 합니다. 보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성을 내포하니까요. 1인칭 ‘나’를 중심으로 서술된 소설의 영화화는 더 큰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소설 속 인물이 겪는 감정은 인물의 언술로 독자에게 전달되는데, 영화에선 인물이 느낀 감정이 소설의 언술과 동일한 무게감으로 구현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아니 에르노의 소설은 작가가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라고 말해왔을 정도로 작품 세계 근간이 오토픽션(자전소설)입니다. 1인칭을 벗어날 수 없는 시점(視點)이란 뜻입니다. 이 때문에 영화를 보기에 앞서 독자이자 관객으로서 우려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결론적으로 광기에 가까운 주인공의 상실감을 잘 표현한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프랑스 대학교수 엘렌은 러시아 영사관 보안요원 스비친의 내연녀입니다. 엘렌은 한 아들(소설에서는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이고 남편과는 결별했습니다. 스비친은 러시아 국적의 기혼남성으로 가정이 있기에 엘렌은 스비친이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서로 만나긴 어렵습니다.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엘렌은 스비친에게 완전히 빠져든 상태로, 하루 종일 스비친의 연락만 기다리며 살아가고, 스비친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편집증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지요.

    영화에는 주인공이 느낀 허기와 광기가 고스란합니다. 그런 엘렌의 마음을, 노벨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나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말고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어진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2010년 출판된 <단순한 열정> 1판을 저본 삼았음. 12~17쪽 문장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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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재하는 모든 것의 공포

    스비친은 엘렌을 욕망하고 엘렌은 스비친을 욕망합니다. 하지만 영화와 소설 <단순한 열정>이 단지 두 남녀의 만남과 이별만 담아낸 통속소설이었다면 1991년 처음 출간된 후 30년 넘게 생명력을 유지하지는 못했겠지요.

    아니 에르노는 불륜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한 인간이 사랑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상실감이 얼마나 큰 허기와 공포로 다가오는지를 냉소 가득한 문체로 기술합니다. 이 영화에서 정사 장면의 선정성을 걷어내고 상실을 겪은 이후의 엘렌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존재와 부재에 관한 질문이란 영화적 주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영화에는 소설에 기술되지 않은 몇몇 장면이 삽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스비친이 떠난 뒤 엘렌은 아들과 함께 피렌체로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지의 한 교회에서 엘렌은 “극좌파들이 몰려와 낙서를 하면 신부님이 매일 그 낙서를 지운다”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과거의 흔적이 부서진 교회 벽면의 부조를 보면서 깊은 떨림을 느끼기도 합니다.

    모든 흔적은 오래전 부재가 시작된 모든 존재의 기호입니다. 소설을 보면 엘렌이 찾은 이 교회는 피렌체 바디아 교회로 추측되는데, 엘렌은 그곳에서 자신과 스비친이 가졌던 경험과 기억이 결국 저 부서져가는 벽화처럼 사라질 것임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극도로 갈망하던 무언가를 영영 잃어본 사람은 이미 압니다. 상실의 예감은 때로 공포로 다가오기 마련이며, 그것은 극한의 정신적 고통으로 연결된다는 것을요.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고통은 도처에 있었다. 차라리 방에 강도라도 들어와 나를 죽여주었으면 싶었다.’(49쪽) 주인공 엘렌, 아니 소설가 아니 에르노는 지금 자신의 기억의 빛이 바래는 순간에 저항하고 있는 인간입니다.

    고귀한 사랑은 없는가

    영화를 만든 다니엘 아르비드 감독은 상영시간 99분 동안 아니 에르노의 소설의 현재적 재해석을 시도합니다. 소설 <단순한 열정>의 배경, 그러니까 아니 에르노가 ‘그’를 만났던 때는 1980년대의 어느 날로 추측되는데, 당시엔 일반인이 사용 가능한 휴대전화가 없었지요. 영화에선 엘렌과 스비친의 휴대전화가 중요한 연결고리로 작용합니다. 엘렌은 스비친이 러시아로 떠나자 구글 웹사이트의 스트리트뷰로 스비친의 도시를 찾아보며 흔적을 뒤쫓습니다.

    아르비드 감독이 영화에 추가한 장면 가운데 유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수업 중이던 엘렌이 학생들에게 시인 보들레르를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문학사에 조금 관심을 둬본다면 그 장면에 깃든 함의를 유희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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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렌은 학생들에게 “시의 목적은 시 그 자체로, 대단히 아름답고 고귀한 시다운 시란 것은 없으며, 단지 시를 쓰는 기쁨을 위해 쓸 뿐이다”라는 보들레르의 글을 소개합니다. 보들레르는 상징주의 시론을 편 예술가로 저 말은 예술의 무(無)목적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예술에는 목적이 없고 그저 예술 자체가 목적이란 뜻이겠지요. 아르비드 감독은 영화 <단순한 열정>을 통해 예술이 그러하듯 사랑도 목적지향적일 수 없다는 강력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고귀한 사랑만이 사랑이 아니며, 오직 인간은 사랑을 하는 기쁨을 위해 사랑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요. 누구도 타인의 사랑에 대한 판관일 수 없습니다.

    엘렌의 이 강의 장면은 영화 시작 후 20분쯤 지난 뒤 나옵니다. 이 대사는 엘렌과 스비친의 숱한 정사 장면이 갖는 외설스러움과 그로 인한 촉발될 논란을 단숨에 무력화시키기도 하지요. 무용하고 무익하더라도 예술을 지향하는 것처럼 인간은 사랑을 지향한다고 말하는 엘렌의 입을 통해서 말입니다. 위 문장은 소설 첫 장에 아니 에르노가 인용한 “우리 둘은 사드보다 더 외설스럽다”(롤랑 바르트)라는 인용구와 길항합니다. 따지고 보면 예술(시)와 사랑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극히 희귀한 순간에만 이뤄진다는 것, ‘영혼의 만남’이 이뤄진 후의 상태라는 것.

    열정은 곧 수난이다

    소설에선 ‘열정’이란 감정에 관한 사유가 가득합니다. 아니 에르노는 씁니다.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것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렇다.’(19쪽) 아니 에르노에게 열정은 상실과 결핍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기능합니다. 두 존재가 품었던 욕망을 긍정하는 대신 부재의 공포를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스비친의 부재는 엘렌에게 ‘나’란 존재의 삭제라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너의 부재는 결국 나의 부재가 됩니다. 그것은 공포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이 결핍을 채우기 위해 완전무결한 열정을 지녀야 합니다. 그 열정은 너무 뜨거워서, 어떤 질병처럼 느껴집니다.

    소설과 영화의 제목 <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에서 ‘열정’은 남녀가 느끼는 뜨거운 열락(悅樂)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느낀) 수난을 동시에 의미한다고 합니다. 수난의 다른 말은 고통이겠지요. 모든 열정은 상실과 결핍에 기대며, 그 상실과 결핍의 반작용으로 열정이 피어납니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렇다면 순수한 열정과 그에 뒤따른 고통조차 결국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 되겠지요. <단순한 열정>이 창조한 엘렌, 현실에서의 아니 에르노는 저 동전 하나를 손에 쥐고 어딘가로 질주하다 망가지고 마는 자기파괴적인 우리 모두의 또 다른 얼굴일 겁니다.

    사랑이 열정과 고통을 동시에 품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의 총합이라는 것, 이 진리는 너무나도 ‘단순’합니다.

    김유태 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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