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위화 ‘살아간다는 것’ vs 장예모 ‘인생’ | 사는 것,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살아내는 것

    입력 : 2023.01.10 17:01:17

  • 중국 현대소설 거장 위화가 최근 서울 광화문을 찾았습니다. 신작 소설 <원청>과 관련해 한국 독자를 만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연단에 선 위화 강연에 많은 청중이 조용히 귀 기울일 정도로 한국에서 중국 작가 위화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위화는 매년 10월이면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을 올려 왔고 유명 소설인 <허삼관 매혈기>를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중국은 2012년 노벨문학상 작가를 배출했는데(모옌), 차기 중국 노벨문학상 작가를 꼽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위화입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 거장 장예모 감독의 영화 <인생(To Live)>을 떠올리며 위화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이 영화는 1994년 프랑스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그랑프리)과 남우주연상을 동시에 받은, 단 한 작품으로 본상 트로피를 두 개나 거머쥔 장예모 감독 최대 걸작으로 통합니다. 위화는 영화 <인생>의 원작소설 <살아간다는 것>의 작가입니다. 수상 이후 위화는 나이 마흔도 되기 전에 세계적인 소설가로 거듭났습니다. 소설 <살아간다는 것>의 독자는 적게 잡아도 1억 명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30년간 이 소설을 원작 삼은 영화 <인생>의 관객은 1억 명을 훌쩍 넘겠지요. 비극과 희극이 쌍곡선의 실타래처럼 뻗어나가는 이 위대한 이야기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위화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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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과 역사의 박물관

    때는 1940년대. 복귀(福貴)라는 좋은 이름을 가진 한 중국인 남성이 ‘주사위 도박’으로 선조가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탕진합니다. 복귀는 기생집에서 경박한 여자들이 신음소리를 내도록 돈을 주며 놀고, 밤새 도박을 하다 해가 뜰 무렵 지치면 ‘뚱뚱한 기생’이 자신을 업도록 한 뒤 미곡상을 운영하는 장인에게 무례하게 손 인사부터 하는 무례하고 얼빠진 노름꾼이었습니다. 복귀는 심지어 임신한 채로 도박장을 찾아와 “제발 도박을 그만두라”며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아내 가진의 뺨을 있는 대로 갈기는, 정신 나간 ‘도련님’이기도 했습니다.

    탕자로 살던 복귀가 도박으로 모든 가산을 날리면서 그는 삶의 첫 번째 변곡점을 경험합니다. 인생의 불행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복귀는 국공내전에 휘말려 국민당에 끌려가고, 이어 전쟁 포로가 된 해방군 막사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섭니다. 전후 돌아온 고향에서 그는 잠시 가족들과 행복한 삶을 계획하지만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차례로 경험하며 냉혹한 세상의 무게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 사이 복귀의 의도와 다르게 가족이 하나씩 사망합니다. 그는 결국 끝나지 않는 비극의 주인공이 돼버립니다. 소설은 영화와 달리 노인이 된 복귀가 나무 밑을 지나던 한 남성에게 자신의 지난 40년 삶을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인형의 그림자, 인간의 그림자

    복귀의 생계수단인 그림자극(劇)은 영화 <인생>과 소설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소설에서 복귀는 도련님의 체면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앗아간 도박꾼 용이를 찾아가 일단 땅부터 빌립니다. 용이의 소작농을 자처해 연명을 구걸한 셈이지요. 영화는 좀 다릅니다. 복귀는 도박꾼 룽얼(소설의 용이)을 찾아가고, 그런 복귀에게 룽얼은 그림자극에 쓰이는 종이 인형이 담긴 나무궤짝 하나를 건넵니다. 얇은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후방에서 빛을 쏘아 인형의 그림자로 이야기를 만드는 공연용 소품이었죠. 종이로 만든 관절 인형의 음영(陰影)으로 이야기를 만들면 관객이 모이고, 이로써 복귀는 삶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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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귀는 그림자극으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림자극은 복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국민당에 억지로 차출되거나 뜻밖에 해방군 포로가 됐을 때에도 복귀는 그림자극 극단을 꾸려 겨우 죽음을 면했습니다. 반면 룽얼은 자신의 오랜 생계수단이었던 그림자극 궤짝을 복귀에게 넘긴 뒤 머지않아 악덕지주로 몰려 공개재판을 당하고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쯤 되면 그림자극의 의미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지요.

    그림자극은 복귀의 불운함을 상징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격동의 시대를 살아내도록 돕는 양가적 도구입니다. 그림자가 투영되는 얇은 막(幕)을 사이에 두고 현실과 초현실이 전시되는데, 종이 인형의 그림자는 바로 우리 모든 인간사의 함축이자 은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림자를 보며 창극을 부르는 복귀가 두려운 얼굴로 변하는 건 군인의 칼이 공연 중이던 막을 찢고 그가 현실에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종이 인형의 세계는 그에게 안온한 장소이지요. 고통으로 가득한 막 저편의 객석과 다르게 말이지요.

    막에 비추이는 그림자의 이야기엔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절망도 함께합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시에도, 또 대약진운동이 한창인 와중에도 복귀가 그림자극 궤짝을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으려 분투하는 건 그림자극 안에 자신의 인생이 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국민당과 해방군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면서도 복귀의 그림자극을 보며 깊은 위안을 얻는 장면은 그림자가 단지 종이 인형의 그림자만은 아님을 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복귀가 끝까지 버리지 않은 꿰짝은 영화의 결말에서 복귀의 손자가 키우는 병아리의 집으로 재사용됩니다. 복귀에게 궤짝은 생이 누워야 할 구유이자 요람인 셈이지요. 우리는 자기 자신의 상자 안에 무엇을 넣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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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남겨진다는 것

    전혀 다른 색채의 결말은 소설과 영화의 두 번째 차이점입니다. 영화는 노인이 된 복귀가 어린 손자를 돌보며 살아가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아내 가진은 병이 들어 누워 있고 사위 얼시와 손자 만터우가 복귀 옆에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밥을 먹습니다. 복귀와 가진의 아들 유경, 딸 봉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죠. 영화는 남은 인물들이 함께 식사하는 평범한 장면을 통해 역경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삶이란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보다 소설은 더 비극적입니다. 두 자녀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것도 모자라 아내와 사위, 심지어 손자까지도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겨진 건 복귀와 그가 키우는 늙은 소 한 마리뿐이지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촌부 복귀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국 소설은 삶의 절대적인 비극성 속에서도 운명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비록 병들었지만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아내 가진의 모습을 통해 삶을 긍정해보는 영화와는 결이 다르지요. 어떤 결말을 선호할지는 각자의 몫일 것입니다.

    삶이라는 나무 아래의 인간

    소설 <살아간다는 것>의 원제는 살아가기 또는 인생이라는 뜻의 ‘활착(活着)’으로 중국에서 주로 쓰이는 단어라고 합니다. 하지만 활착이란 단어에선 사람의 삶(人生)보다 좀 더 치열하고 악착스런 어감이 느껴집니다. ‘붙을 착(着)’이란 글자에서 오는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이 숙명적으로 걸어가야 할 삶의 불가피성과 불가해성. 거대한 높이로 성장하는 생이라는 우주적 나무에 겨우 빌붙어서, 그곳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남루한 삶을 이어가보려는 인간의 본질적인 숙명이 단어 ‘着’과 만나면서 생겨나는, 절박함의 그 무엇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따지고 보면 사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과 살아내는 것과 살아지는 것과 살아본다는 것은 (혹 다른 단어가 허락되더라도) 엄연히 다른 생의 자세를 함축합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의 자세로 저 먼 길을 걸어갈 것인지를 소설과 영화의 복귀는 고행에 가까운 삶의 양태로서 우리에게 가만히 묻고 있습니다. 위화 작가는 이 소설이 중국사회과학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됐던 당시 머리말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거의 모든 우수한 작가라면 누구나 현실과의 긴장관계 속에 있으며, 그들의 붓끝에서, 마침내 현실이 요원한 상태에 처하게 될 때 그들의 작품 속의 현실이 찬란히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이 소설과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이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인생의 절망과 불운이 생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들어왔을 때 복귀의 눈물과 웃음을 기억해보시길 바랍니다.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 살아내는 것이니까요.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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